나의 이야기

[스크랩] (정통기수련,빙의)한국의 도교

사무처 2014. 2. 28. 04:59

한국의 도교

 

도선비결

신라말 고려초에 승 도선이 지었다고 한다.

 

[한국의 도교]

 

한국 도교의 성격

 

단군신화와 신선설

중국 신선방술의 발생과는 별도로 우리 나라에는 고대로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토착적인 고유 문화현상으로서 산악신앙·신선설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의 방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고대의 건국신화가 산악신앙 및 신선사상과 직결되어 있으니, 단군신화를 보면 그것을 곧 알게 된다.

천제 환인(桓因)의 지차아들인 환웅(桓雄)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강림한 곳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이었다. 환웅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을 본원으로 하여 이 땅 특유의 신선사상이 전개되고 이 땅의 선파(仙派)가 생겨나게 된다.

단군신화에 언급된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은 한국신선사상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고, 후세 선파에서 내세운 환인과 환웅으로 연결시킨 단군의 정신과 교훈은 인간만사의 도리와 우주삼라만상의 이치를 두루 포괄하는 것이었다.

‘결청지학(潔淸之學)’·‘연양지도(鍊養之道)’·‘인간선사(人間善事)’·‘신도묘덕지훈(神道妙德之訓)’ 등의 용어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환인의 도가 환웅과 단군을 거쳐 전해져서 그것이 다시 문박씨(文朴氏)·을밀(乙密)·영랑(永郎)·안류(晏留)·보덕성녀(普德聖女) 등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선가설은 퍽 오래 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선파로 지목된 인물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져 내려 온 것 같은데,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불우한 은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선파 사이에서는 중국의 지배를 배격하는 주체적인 사관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고, 중국문화로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며 자주적인 문화의 건설을 모색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무한한 저력에 대한 신심과, 우리 겨레가 세계를 영도하는 지위에 오를 영광된 장래가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선과 결부시켜 예술가를 경애하는 등 우리 고유의 선가설과 관련된 특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은 그 전승과정에서, 수련적인 도교와 습합하면서 변천하여 내려 왔다. 따라서 이러한 신선사상은 도교적인 문화현상으로 간주하여 한국 도교의 특징의 하나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의적 도교

이 땅에 도교가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고구려 말기였고, 그것은 주로 국가를 위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禳災祈福] 재초(齋醮)를 중심으로 한 과의적(科儀的)인 도교였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대륙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 큰 판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도입해 당시의 고구려 사상계를 개편함으로써 정권을 성공적으로 확보하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큰 판도를 지탱해 나가는 국력을 길러 중국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토멸한 뒤 신라는 고구려가 차지했던 대륙의 강역은 당나라에 빼앗기고 장악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조사로는 국가를 위하여 양재기복하는 도교의 재초가 신라에서 행해진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도교의 재초가 극히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예종 때에 와서는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는 등 국가적 종교로서의 도교가 강화되었다. 대외정책도 한때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국을 창건하고, 고려는 발해의 혈통을 이어 결국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도교와 관련시켜 볼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과의적인 도교가 국가의 비호 아래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유신(儒臣)들 사이에서는 한낱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 조선에서 하늘을 제사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 하여 도교의 재초를 극렬하게 반대하였고, 대단한 논란이 되풀이된 끝에 소격서(昭格署)가 혁파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도교와 대판도주의는 상관관계가 없지 않으리라는 견해도 있는데, 그것은 대체로 과의적인 도교의 기복을 배경으로 도출되었으므로 과의도교는 한국 도교의 한 특징으로 꼽히게 된다.

수련적 도교

한국 도교의 세 번째 특징으로 수련적인 도교가 우리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수련적인 도교는 신라 말기 유당학인(留唐學人)들이 당나라에서 도입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땅의 도맥도 이로부터 형성되었다.

이 도맥을 보면 신라 때는 최치원(崔致遠)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고려시대는 비약이 심하여 보잘 것이 없으며, 조선 초기로 내려와서는 김시습(金時習)이 중흥시조 같은 지위를 차지하여 그 전승이 뚜렷해진다.

불로장생 같은 현세적인 이익의 추구가 그 중심이 되는 도교에서 수련을 통해 불로장생을 획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것들은 결국 마음의 평정과 신체의 건강에 이바지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적인 도교는 우리의 옛 지식인들에게 어느 면으로는 인생의 운치나 위안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동시에 좋은 건강관리법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들은 수련적인 도교에 양생법이 있음을 인식하고, 심지어 이황(李滉)·이이(李珥) 같은 학자들까지 그것을 받아 들여 실생활에 응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도교에서는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수련을 통한 건강관리법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특한 의학을 수립하기까지 하였다.

도교의학은 고려시대에 이미 들어온 바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리 의학이 도교의 이론에 따라 철저하게 체계화되었다. 도교에서는 예방의학이 대단히 강조되어, 평소에 신체의 조화를 깨서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생활하는 것이 최상의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도교적인 의학사상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의서인 ≪동의보감≫ 편찬에 수용되어 엄연한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도교의 수용과 그 전개

오두미도 五斗米道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인용된 <고구려본기>의 기사에 따르면 7세기 전반에 고구려인들이 다투어 오두미도를 신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땅에서 오두미도가 시작된 지 거의 5세기가 지난 때였으므로 그것이 들어온 경위가 문제이다.

중국의 도교는 후한 말기를 전후하여 성립한 태평도(太平道)와 천사도(天師道)를 조형(祖型)으로 형성되었는데, 천사도는 곧 오두미도의 교법과 조직을 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오두미도란 입교자에게 쌀 닷말씩을 바치게 한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후한 환·영제(桓靈帝) 때 장릉(張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구려에서 7세기경 민간에 오두미도가 성행한 이유를 지금으로서는 상세하게 살펴볼 방도가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 고국천왕 19년조에, ‘중국이 크게 혼란해져 한인(漢人)이 난리를 피하여 내투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그것은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197)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때 내투한 중국인이 오두미도를 가져왔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장로가 오두미도를 정착시킨 시기보다 이르고, 태평도의 교주였던 장각(張角)과 동시대의 사람인 장수(張脩)가 만든 초기의 오두미도가 피난민과 함께 고구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 때 유입되었다면 고구려의 오두미도 신봉의 역사는 퍽 길어진다.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6세기 초 중국에서 천사도로도 불리는 오두미도가 중국의 연안지대를 거쳐 민간을 통해 고구려에 전파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고구려에서 신봉되었다는 오두미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규모의 대소는 어떻든 간에 신도들을 통할하는 조직이나 기구가 존재하였을 것이고, ≪도덕경≫의 송독, 삼관수서·부적·기도 등도 시행하였을 것이다.

도교의 도입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따르면, ‘영류왕 7년(624)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니, 영류왕은 나라사람들과 함께 그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도교가 정식으로 고구려에 전래하였으나 그것이 국가적인 종교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그 뒤 20년이 경과하여 643년(보장왕 2) 당시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숙달(叔達) 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와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유교·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보장왕은 불교 사찰을 도관으로 만들어 도사들을 그 곳에 거처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여러 도교행사를 곁들여 국가를 진호하는 재초를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도교가 고구려에 정식으로 도입되었고, 도교가 국가를 진호하는 소임을 담당하는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연개소문이 도교 강화책을 쓴 데는 고구려에서 유·불의 세력을 감쇄시킬 기도도 있었겠으나, 도교를 숭상하는 당나라의 종교정책이나 문화정책과 맞서 보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본전(本傳)에 인용된 바와 같이 그가 국왕에게 고한 말에 “듣건대, 중국에서는 삼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아직도 빠져 있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것을 음미해 보면 그러한 의도를 읽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보장왕 본기의 기사에도 “삼교는 마치 세 발 솥의 발 같아서 하나가 없어도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 흥왕한데, 도교는 아직도 성하지 않으니 이런 상태로서는 천하의 도술을 다 갖추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전부터 민간의 오두미도 신봉이 있었으며, 20년 전 영류왕 때 도사·천존상·도법 및 ≪도덕경≫의 전래가 있었고, 또 보장왕 때에는 도교가 국가의 종교로 강화되었으니, 고구려에서 도교는 생소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양의 성세(城勢)가 반월성이어서 국세의 위약을 나타낸다 하여 도사들이 나서서 주축(呪祝)으로 상제(上帝)가 남하룡(南河龍)에게 조칙을 내려 그것을 만월성으로 가축(加築)하게 하고, 그것을 용언성(龍堰城)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도교를 이용한 심리전략이었다고 하겠다.

불교측의 반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국가 종교의 주도적인 지위에 올려 놓은 일은 마치 5세기 중엽에 북위(北魏)에서 최호(崔浩)가 태무제(太武帝)를 귀의시켜 구겸지(寇謙之)가 영도하는 신천사도(新天師道)로 정비된 도교를 국가 종교로 굳게 자리잡게 하고, 이어 그때까지 지반을 굳히고 있던 불교를 탄압한 선례를 재연한 듯한 느낌을 준다.

유교와는 종교적인 색채가 그리 짙지 않고 사찰을 빼앗기는 따위의 피해도 없었으므로 큰 충돌이나 마찰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종교적 지반을 굳히고 있었던 불교는 도교의 본격적인 도입과 그 강화로 인해서 극심한 타격을 받았으므로 불교측은 도교 강화책에 대하여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승려 보덕(普德)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던 반룡사(盤龍寺)에 거처하던 당시 불교계의 영도자였는데, 그가 “좌도(左道:도교)가 정도(正道:불교)에 맞서서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짐을 슬퍼하여 누차 국왕에게 간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고 한 것이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기록되어 있다.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도교 강화책을 반대한 것은 핑계였고, 실상은 불교의 탄압에 항거하고 나선 것이라고 하겠다.

보덕은 평양에서 전주로 남하할 때 신력(神力)을 발동시켜 방장(方丈:거처하는 암자)을 날려서 단숨에 고대산(孤大山)까지 옮겨 갔다고 한다.

이렇게 고승이 신력을 발휘했다는 고사는 도교측의 도력(道力) 과시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도교 강화책의 여파로 보덕과 같은 사례가 많이 생겨, 불교는 고구려 이외의 나라에 전파되었다.

수련적 도교와 방술(신라의 도교)

도교의 잡술

신라시대는 도교의 잡술을 연상시키는 기적을 나타내고 신이한 방술을 구사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신라 초의 호공(瓠公)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도와 인접국과 수교의 사명을 수행하여 신라의 국위를 떨친 인물인데 바람과 비, 새와 짐승을 마음대로 부리는 대단한 방술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에 관해서도 방술의 신비성을 띤 설화가 ≪삼국사기≫ 권41∼43의 본전과 ≪삼국유사≫ 김유신조 등에 전한다.

김유신은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는데, 그것은 칠요(七曜)에서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하여 생래적으로 신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그는 17세 때 이미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통삼대공(統三大功)을 성취할 힘을 내려 주기를 기도했는데, 신이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요청대로 방술의 비법을 전수했다.

그 뒤 또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천관(天官)에게 빛을 드리워 자기 보검에 강령(降靈)해 달라고 비니, 두 별에서 광채가 내려와 그의 보검을 동요시켜 신령한 기운을 내려 주었다.

김유신의 보검은 고구려군과의 접전에서 신비한 위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항시 음병(陰兵)의 호위를 받고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김유신에 관련된 신이한 설화들은 도교적인 색조가 농후하고 도교의 잡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김유신의 증손 김암(金巖)도 방술을 좋아하여 숙위(宿衛)로 당나라에 가 있을 때 도교 방술에 포괄되는 음양가법을 배우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터득하였다.

그는 귀국 후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로 팔진병법(八陣兵法)을 가르쳤으며, 하늘에 빌어 메뚜기의 재해를 물리치는 등 방술을 구사하였다.

이 밖에도 신라시대는 시가(詩歌)와 결부된 이적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월명사(月明師)가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해가 둘 나타난 괴변을 없앴고, 융천사(融天師)가 <혜성가 彗星歌>를 지어 혜성을 없애고 침범해 온 왜군을 제발로 물러가게 하였다는, 향가를 둘러싼 전설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을 방술만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방술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나말 학인들과 도교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 가운데 수련적인 도교를 이 땅으로 전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동전도록≫ 같은 우리 나라의 도서(道書)에 그 경위가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처에 도교 사원인 도관이 건립되어서 국가나 개인이나 양재기복하는 재초, 곧 과의적인 도교의 제례행사가 매우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그래서 당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에게는 도관의 재초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도교의 재초에 사용하는 제문이나 축문은 재사(齋詞)니 청사(靑詞)니 하여 불가의 도량문(道場文) 등과 구별된다.

최치원과 같이 한때 당나라에서 벼슬을 살면서 문한(文翰)을 다루던 사람은 당나라에 있을 때 이미 적지 않은 재사나 청사를 짓기까지 하였고, 그 글이 문집 등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의 학인들에 의해 수련적인 도교가 이 땅에 이입되었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견해라고 할 만하다.

9세기 중엽 신라의 학인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와 승려 자혜(慈惠) 등 3인이 중국에 유학하여 종남산(終南山) 광법사(廣法寺)에서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를 만난 것이 기연이 되어 신원지의 알선으로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청화비문 靑華祕文≫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도서(道書)와 구결(口訣)의 전수를 받았고, 3년 동안 수련한 끝에 단(丹)을 이룩하였다.

여기에서 단을 이룩하였다고 한 것은, 신선이 되는 약인 금단연조에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라, 심신의 수련을 통한 공행이 양전한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말한다.

김가기는 한때 신라에 다녀갔으나 ≪속선전 續仙傳≫ 등의 기사를 보면 858년 2월 25일 당나라에서 백주에 신선이 되어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보다 11년 뒤인 869년 당나라에서 유학한 최치원과 역시 유당학인인 이청(李淸)에게 김가기가 구결을 전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승우는 신라로 돌아와 태위(太尉) 벼슬까지 지냈는데, 그도 귀국하여 최치원과 이청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93세의 장수를 누렸다.

자혜는 의상(義湘)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맞는 견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는 귀국 후 오대산으로 들어가 승려 명법(明法)에게 도요(道要)를 전수하고 145세에 태백산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환인 이래, 이 땅 고유의 도맥 이외에 유당학인을 통해 수련적인 도교가 흘러 들어와 새로운 도맥을 이어 나가게 된 것이다. 최치원은 김가기와 최승우 두 선배로부터 도요를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자혜의 계통에 속하는 권청(權淸)과도 접촉이 있어 도법을 연마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당학인이 이 땅에 형성한 새로운 도맥은 고려와 조선에까지 전승되었는데, 그 계보는 최치원에서 직접 뻗어나가지 않고 이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갔다. 이청은 명법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명법은 다시 자혜로부터 도요를 배운 뒤 권청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최치원과 도법을 연마한 뒤 그것을 후대에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들어온 수련적인 도교는 기인괴사들의 단학설화(丹學說話)도 생겨나게 하고, 도교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기풍을 조성해서 일반 학인들이 흥취를 구하는 한 가지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수련적인 도교의 전승

≪해동전도록≫은 규장각본에 조선 중기의 한무외(韓無畏)가 기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무외는 곽치허(郭致虛)로부터 도요를 전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곽치허가 그에게 한 부탁이 “정양(正陽)의 한 줄기 맥이 실추되지 않으리니 힘쓰고 힘쓰라.”로 맺어져 있다. 정양은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종리권의 존호이다.

본성적인 단학은 중국에서는 금대(金代)에 성립된 도교의 한 종파인 전진교(全眞敎)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전진교에서는 여동빈(呂洞賓)을 종조(宗祖)로 받드는데, 여동빈은 종리권의 전수로 득도하여 선화(仙化)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전진교에서는 종리권을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존칭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전진교의 성립은 12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금대에 내려와서이므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본성적인 단학을 중심으로 한 도교를 수련한 일을 전진교와 결부시켜 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전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내단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의 일파가 당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그 계통의 도교와 접촉을 갖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따진다면, 그러한 도법이 유당학인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은 전혀 무근한 일이고, 금대에 시작된 전진교의 한 분파의 교법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중국에서 들어온 뒤 이 땅에서 그 계통의 도맥을 소급 설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내력을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전승한 단학은 환반지학(還返之學)과 시해(尸解)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나, 전수된 도서와 저술된 도법은 다양하다.

수련적인 도교에서의 환반의 뜻은 금단 연조에서의 칠반구환(七返九還)의 법을 본성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대체로 심신·성정·육체에 걸쳐 분산된 정력을 수습해서 응집된 상태에서 유지, 보존하여 장생불로에 이르게 하는 수련방법이라 하겠다. 시해는 도법을 수련한 끝에 죽는 형식만을 빌려 신선이 되는 방법이다.

도교의 재초와 습속(고려의 도교)

재초의 거행과 그 종류

신라시대에는 왕명에 따라 변이(變異)를 기도로써 물리친 일이 있었다고 하나 어떠한 방법을 따랐는지는 알 수 없고, 도교의 재초가 국가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국가를 위해 소재초복(消災招福)하는 재초 등의 과의적인 도교행사가 자주 열렸고, 심지어는 의종같이 군왕 자신의 개인적인 소재초복을 위해 국비를 기울여 각종의 재초를 번거롭게 지내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듯 고려에서 과의적인 도교가 성행한 데는 고려초 이래 대량 이주한 발해인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발해는 고구려인에 의하여 세워졌으므로 도교를 숭상하던 풍습도 전승되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현종 때부터 재초가 행하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 뒤 예종 때는 재초가 자주 거행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여진다.

옥촉정(玉燭亭)에 원시천존(元始天尊)의 도상(道像)을 안치하고 월초(月醮)를 지내게 한 일이라든지, 도관인 복원궁을 수도에 창건하여 각종의 도교행사를 집행하게 한 일이라든지 하는 것은 예종 때 특히 두드러진 도교숭상 사례이다. 그러나 수련적인 도교는 고려시대에 별로 성행한 것 같지 않아서, 그 방면의 전설이나 설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 거행된 재초의 종류는 천계(天界)를 대상으로 한 호천상제(昊天上帝)·호천오방제·천황대제(天皇大帝)·태일(太一)·천조(天曹)·삼계(三界)·삼청(三淸) 등과, 성수(星宿)를 대상으로 한 남두·북두·노인성·11요(曜)·28수·12궁신·27위신·100신(神)·본명성수(本命星宿) 등과, 재변양제(災變禳除)를 위한 도우(禱雨)·도병·5온신성변기양(五瘟神星變祈禳) 등과 기타 전성제천(氈城祭天)·별공재초(別貢齋醮)·마리산참성초(摩利山塹城醮)·하원초(下元醮) 등이 있다.

이러한 재초에는 그 축문인 재사 또는 청사가 있는데, 그것을 지어 정서한 뒤 국왕이 친서하고 신료가 대독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 이후의 재초에 사용한 청사는 ≪동문선≫에 작자명과 함께 여러 편이 실려 있다. 그 문체는 대체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되어 있고, 내용은 도교의 설법을 곁들여 국왕의 처지에서 재앙을 양제하고 복록을 기원하는 뜻이 있다.

도교 연구와 도관 건립

고려시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도교 전적이 많이 읽혔는데, 그 중 이중약(李仲若)은 도교연구에 남다르게 열중하였던 인물이다. 임춘(林椿)의 <일재기 逸齋記>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도교적인 성품이 있어 ≪도장 道藏≫을 즐겨 읽었다.

청년기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의 월생산(月生山:지금의 月出山)에 집을 지어 일재라 하고 세속을 떠나 거기에서 ≪황정경 黃庭經≫ 같은 도서를 읽으며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도교수련과 직결되는 의술도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의 의술이 알려져 숙종의 병을 시술하도록 불려 갔으나 궁궐에 도달하였을 때는 숙종이 이미 운명한 뒤였다.

예종이 그를 좋아하여 궁중에 머물러 있게 하며 도교의 요리(要理:중요한 교리)로 응대하고 지냈다. 그 뒤 그는 바닷길로 송나라로 건너가서 황대충(黃大忠)으로부터 직접 도요를 전수받고 도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돌아왔다.

귀국 후 이중약이 예종에게 상소하여 현관(玄館:도교사원)을 설치하여 국가 재초의 복지(福地)로 삼도록 한 건의가 받아 들여져 건립된 것이 복원궁이었다.

이중약은 복원궁의 강석(講席)에서 큰 종을 울려 도교의 요리를 가르쳤는데, 그것을 배우러 모여든 사람들이 문을 메웠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복원궁은 왕부의 북쪽 태화문 안에 있었고, 전내(殿內)에는 삼청상(三淸像)이 그려져 있었으며, 공행이 높은 도사 10여 인이 그곳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이들 도사는 관원같이 낮에는 복원궁에서 일을 보고 밤에는 사실(私室)로 돌아가곤 하여 계율을 지키지 않아 속인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 땅에 도교 교단이 성립되지 않은 원인을 이런 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송나라 휘종(徽宗)은 1110년(예종 5) 중국 도사 2인을 신사(信使)로 딸려 보내 고려에서 도법에 통달한 자들을 골라 지도해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고려에는 도교 교법과 의식에 조예가 있는 인사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또, 1118년 송나라 휘종이 보낸 의관 7인이 고려에 와서 2년 동안 고려의 의학인들에게 중국의학을 가르쳐주어 고려의 의약행정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도교의학도 도입되어 이 땅의 의약전통에 참여하기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도교습속

고려시대 도교의 장생법과 사과신적(司過神的) 신앙에서 생겨난 수경신(守庚申)의 습속이 상하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수경신은 경신수야(庚申守夜) 곧 경신일마다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습속이다. 도교에서는 사람마다 주어진 수명은 2주갑, 즉 120세인데 그가 저지르는 악행의 정도에 따라 그 비례로 수명이 단축된다고 본다.

사람은 악행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기는 어려운데, 삼시충(三尸蟲)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인체 내에 기생하면서 그 숙주(宿主)가 저지른 악행을 살펴 60일마다 오는 경신일 밤 숙주가 잠든 사이에 빠져 나가 천제에게 그것을 고해 바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례보고를 막기 위해 삼시충이 체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경신일 밤을 자지 않고 지새우는 것이 수경신이다.

밤을 새우는 일은 무료하므로 주연을 벌여 노는 축제 성격을 띠게까지 되었다. ≪고려사≫ 1265년(원종 6) 4월조에 ‘경신일에 태자가 안경공(安慶公)을 맞아다가 잔치를 베풀고 날이 샐 때까지 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경신일에 수야하는 습속을 태자까지 따른 것을 지탄한 것이다.

이러한 수경신의 습속은 조선 초에 이르는 동안 1년의 6경신을 다 수야하는 일은 줄어 들고, 연말 무렵의 마지막 경신일을 철야 축제행사로 지키게 되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경신수야의 습속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제가의 문집에 경신수야를 읊은 한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도교비판과 그 변천(조선의 도교)

과의적인 도교의 존속

조선시대에 와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도교가 신봉되어 대체로 고려의 유제(遺制)를 계승하였으나 그 규모가 축소되었고, 중도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에 따라 국가 중심의 도교의식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1392년(태조 1)에는 예조에서 고려 때 쓰던 복원궁·신격전·구요당·소전색·대청관·청계배성소 등 재초거행 장소를 폐지하고 송도에 있는 소격전(昭格殿) 한 군데만 두기로 하였다. 한양에 천도한 뒤인 1396년 초 정부(丁夫) 200인을 징발해서 한양에 소격전을 영조하였다.

1417년(태종 17) 소격전 제조로 있던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도교의 사전(祀典)을 상정(詳定)하도록 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소격전을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소격서는 도교 재초를 거행하는 국가의 관서여서 그 직제는 제조 이하 서원(署員) 8인과 도류(道流) 약간인 및 도학생 10인으로 되어 있었고, 도류의 공과(功課)와 도과(度課)의 제도가 있었다.

도류취재는 ≪금단 禁壇≫을 낭송시키고 ≪영보경 靈寶經≫을 읽히며, 과의는 ≪연생경 延生經≫·≪태일경≫·≪옥추경≫·≪진무경 眞武經≫·≪용왕경≫ 가운데 3경으로 하였다.

그리고 소격서에는 태일전·삼청전 및 내외 제단이 있어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에 이르는 도교 제신의 신위를 마련하고, 헌관·서원 및 도류가 분담하여 재초를 종합적으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설에는 소격서에 직수전(直宿殿)과 십일요전도 있었다고 한다. 집행된 재초의 종류는, 성신(星辰)을 제사하는 성수초, 태양성 및 화성초, 남·북두초, 금성초·태음초·진무초·직성초·형혹기초(熒惑祈醮)·혜성기초 등이 있고, 그 밖에 개복신초·청명초·도병초·기우초·본명초재·진병초·삼원초·삼계초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연산조에 소격서가 일단 형식적으로 혁파되었으나 재초는 여전히 집행되었고,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가 주도하는 신진사류들이 소격서의 혁파와 왕의 천지신 제사 중지를 끈질기고 격렬하게 고집하여 1518년(중종 13) 소격서를 혁파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행사는 참성초라 하여 도교의 재초로 거행되었고 소격서 혁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지식인들의 도교에 대한 태도

태종은 도교의 재초에 관심이 깊었고, 수련적인 도교에 대해서까지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김첨과 공부(孔俯) 두 사람이 도교에 관련된 일로 태종을 도왔다.

김첨은 고려 말부터 벼슬을 하던 사람으로 도교궁관의 시설과 재초의 의례에 밝았다. 김첨은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부흥시키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 목적은 결국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구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 이래 국가에서 도교를 숭봉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하겠다. 그의 재략과 외교상의 공로를 생각하여 태종은 그를 버리지 않고 제례 등에 관해 그에게 자문하기도 하였다.

1404년 김첨이 성수초제를 상정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는 대청관(大淸觀)을 수리해서 천황대제를 초제하려고 하였으나, 권근(權近)과 하륜(河崙)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해 태종에게 상서하여 과의적인 도교를 국가적 차원에서 숭봉할 것을 간곡하게 권하기도 하였다. 1408년 소격전의 제조로 있던 공부를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딸려 보내 당시 중국의 도교 초사(醮祀)의 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공부는 서장관으로 가기 전에도 이미 중국에 다섯 차례나 다녀와 중국의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였던 것 같고, 수선(修仙)이라 자호한 것으로도 그가 도교에 대해 많은 흥미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 동남(童男)을 거느리고 기우제를 지낸 일도 있다. 태종은 1413년 수진지사(修眞之事:도교의 법에 따라 불로장생하는 도를 닦는 일)를 묻기 위하여 아버지의 상중에 있던 그를 불러다 만나기까지 하였다.

중종 때 신진사류들은 소격서 혁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왕실측과 무섭게 대립하여 간접적으로는 기묘사화의 불씨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들의 상소는 “도교가 이단이고 허황되며 망령스럽고, 도교를 극도로 숭봉하던 당나라 현종(玄宗)이나 송나라 휘종은 오히려 앙화를 입고 수명을 연장할 수 없었다.”고 하여,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교를 정도로 내세우고 도교를 사악한 이단으로 몰아 유도의 정맥을 뿌리 내리는 일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제신앙(關帝信仰)이 흘러 들어와 관왕묘(關王廟)의 건립을 보게 되기도 했지만 과의적인 도교는 쇠퇴하였고, 성리학을 표방하는 지식인들은 표면적으로 도교를 이단으로 물리치는 태도를 취하였다.

민간의 도교

수련적인 도교의 도맥에 들어 있는 조선시대의 인물들을 비롯해 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의 기행과 이적에 관한 기사가 ≪어우야담≫·≪오산설림≫ 등 각종 만록에 보이는 데, 그러한 기사들을 단학설화로 합칭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권경중(權敬中) 같은 사람은 신선벽곡지술(神仙辟穀之術)을 배웠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서도 신선수련술을 좋아한 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 중 홍만종(洪萬宗)은 자신이 신선·도술에 기울어 다시 ≪야사제집≫에서 단가이적의 기사를 집성하여 ≪해동이적≫을 내기도 하고, 그의 만록인 ≪순오지 旬五志≫에도 신선·도술에 관한 기사를 많이 수록하였다.

홍만종의 경우도 자신의 건강유지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겨지지만, 본래 도교의 수련은 양생법과 직결된다.

도학자들까지도 그 점은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한편, 민간에는 직성기양(直星祈禳) 같은 성수와 연결된 행사와 습속이 적지않았다. 도교에서 다루는 성수 중 주요한 것은 칠정사요(七政四曜)·남두육성(南斗六星)·북두칠성이다. 그 중 남·북두에는 모든 사람의 궁함과 통함[窮通], 안락과 근심걱정[休戚]이 다 달려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북두가 더욱 존숭되는데, 그것은 지금의 북두칠성과는 달라서 북신성(北辰星), 즉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일곱 개의 별을 말하는 것으로 그 존숭의 핵심은 북극성에 있다.

북극성은 군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록빈부와 생사화복을 위시한 모든 명운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옥추경≫은 북극성 경배의 진원이고, 또 의약과의 관련이 있어 옥추단이나 벽사문(辟邪文)으로 예방하는 습속이 생겨나게 하였다.

이 밖에 민간에는 삼재예방, 방위의 길흉, 동토 및 입택의 방법 등 인간만사에 부수되는 예방과 선택에 도교적인 풍습이 있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맹인, 즉 판수가 독경해서 민간의 제반사를 지시, 해결해 주는 구실을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결국 도교의 잡술을 맹인이 시행한 사례로, 거기에는 토속과의 합유(合糅)현상도 적지 않았다.

한 때는 명통사(明通寺)를 총본부로 하여 계층이 뚜렷한 맹인들의 조직이 있어 도사 중심의 도교교단과 비슷하였다.

도교의 전적과 양생론

도교의 양생론

도교의 수련은 건강을 유지하여 장수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므로 그것은 곧 양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이론상으로는 불로장생을 꾀하는 것을 반박하였으나, 그의 잡저 <수진 修眞>과 <용호 龍虎>에서 도교수련법의 요체를 천명하였다.

<수진>에서 ‘신선이란 양성복기(養性服氣)하고 용호를 수련해서 늙음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라고 전제하고 ≪양생결≫을 인용하여, ‘본성을 기르는 사람은 늘 약간의 노력을 원하나 지나치게 무리한 행위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고 일러 주고 기행좌와(起行坐臥)에 걸친 주의사항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에 걸쳐 과도한 짓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정(精)을 동요시키지 않고 마음을 적묵(寂默)으로 돌아가게 하면 장생하게 될 것임을 말하였다.

≪용호≫에서는 수련해서 장생하는 것은 천지의 정기(正氣)를 훔쳐내는 것임을 말하고, 그 요체는 호흡을 통하여 음진양순(陰盡陽純)해짐에 있고 공행이 차면 장생초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일종의 양생론이다. 한편, 주희(朱熹)가 ≪참동계 參同契≫와 ≪음부경 陰符經≫ 같은 도서에 관심을 갖고 교주(校注)작업을 한 것 등에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까지도 그러한 부류의 도서를 기탄 없이 열람하였고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사들도 나왔다.

이렇게 해서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심신수양, 건강관리, 또는 생활의 운치 등 다양한 의의를 도교적인 수련법에 부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종교적인 의의가 극도로 희석된 상태에서 수련적인 도교가 받아 들여지기도 했다.

이이(李珥)도 도교적인 방법을 감안한 의약책을 피력하였다. 그는 도교의 연단·등선의 설은 믿지 않으나, 도교에서 개발한 창양(昌陽)·황정(黃精) 같은 연년익수(延年益壽:수명을 더 오래 늘여 나감)한다는 약물의 사용은 그것 나름의 이치가 있어 받아들일 만하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유교적인 효행이 강조되던 시대이므로 사친양로(事親養老:어버이를 섬기며 노인을 부양함)를 위하여 지식인들이 도교의 양생론과 의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황(李滉)도 이찬(李澯)의 8폭 양생설을 보고, 주희가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를 사랑하는 뜻을 알게 되었고, 자기인들 양생하여 지선(地仙)이 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의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의식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도교의학

정렴(鄭Ꜿ)은 ≪북창비결≫이라고도 하는 그의 저서 ≪용호비결≫ 제1장에서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을 설명해 나가는 도중에 정기를 머물러 있게 하여, 풍사가 파고들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방비하는 일종의 건강관리법과 양생법을 말하였다. 그리고 질병이 생겨난 뒤 의사를 찾아가 약을 쓴다 하여도 이미 늦는다고 하였다.

그 착상법은 근대의학적 처지에서도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양생론이나 보건법은 확대 세련되어서 조선시대 의학의 기본 체계를 확립시키기에 이르렀고, 나아가서는 의학의 본의를 해명하는 데까지 전개되었다. 조선시대는 의서의 번각교주 및 언해가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중 ≪동의보감≫은 그 체계 정립에 도교의 철리가 솔직하게 받아 들여졌고,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도교의 특성이 의약의 본의 천명에 적용되어 있으며, 심지어 도교 잡술에 속하는 방법까지 소개되어 있다.

≪동의보감≫ 내경편(內景篇) 집례(集例)에 “도교에서는 청정과 수양을 근본으로 삼고 의문에서는 약이(藥餌)와 침구로 치료를 한다. 이는 도는 그 정(精)을 얻었고, 의는 그 조(粗)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견해를 살린 정연한 구성 밑에서 동양의약에 흔히 있는 허황하고 공상적인 의학론은 극력 배격하고, 의학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의 이치를 파악하여 당시 의학계의 온갖 지식을 총집결하고, 그 의의의 해명에는 도교의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정신을 취하여 편찬한 것이다.

내경편에서는 도서를 많이 인용해서 신형(身形)과 정(精)·기(氣)·신(神)을 설명하고 의자는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보양, 치료할 것을 강조하였다.

외형·잡병·탕액·침구 제편은 실제에 맞는 일반적인 이론과 공평한 치료방법을 제시하기에 힘썼다. 본말과 정조의 구분이 엄연한 체계에 따라 편찬된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허준(許浚)의 주편으로 1612년(광해군 5) 내의원에서 그 초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의 편찬에 정렴의 아우 작(碏)이 참여하였으므로 정씨 형제의 도교적인 의학관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의 의서 가운데 도교적인 관점에서 쓰인 것이 많다. 이종준(李宗準)의 ≪신선태을자금단방 神仙太乙紫金丹方≫, 박운(朴雲)의 ≪위생방≫, 정유인(鄭惟仁)의 ≪이생록 頤生錄≫, 정사위(鄭士偉)의 ≪이양편 二養編≫, 이창정(李昌廷)의 ≪수양총서유집 壽養叢書類輯≫, 최규서(崔奎瑞)의 ≪강기요결 降氣要訣≫,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중 <보양지 葆養志> 등은 다 그러한 의서들이다.

도교의 전적과 그 연구

기록상으로는 고려 중엽의 이중약이 ≪도장≫을 읽은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유당학인들이 많은 도서를 도입한 것으로 전해지므로 그때 ≪도장≫이 이 땅에 들어 왔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규장각도서에 ≪정통도장 正統道藏≫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들여온 것이라 여겨진다.

신라 말기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진 ≪참동계≫는 ≪주역≫과 황로(黃老)와 노화(爐火:금단 연조) 세 가지의 요체를 융합하여 묘치 있게 대도를 터득한다는 뜻을 나타냈다는 도서로 후한 위백양의 저술이다.

이황도 장수를 희구하는 견지에서 ≪참동계≫에 큰 관심을 표명하였고, 권극중(權克中)은 ≪참동계주해≫를 펴냈으며, 최석정(崔錫鼎)과 민이승(閔以升)도 ≪참동계≫를 비롯한 도서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정경≫도 주요 도교경전의 하나로 양생의 요결을 다룬 것인데 우리 나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음부경≫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해서 그것을 운용하는 묘리를 쓴 것으로, 역시 우리 땅에서 많이 읽힌 도교경전 중의 하나이다.

≪옥추경≫은 위작으로 고증되기는 하였으나,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속된 내용 때문에 조선 초기에도 송독되었고, 1733년(영조 9)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개간한 조선각본도 있다.

≪포박자 抱朴子≫도 도교경전의 하나로 편입되어 있는데, 우리 선현들 중 건강과 장수를 희구하고 아울러 인생의 운치를 돋우는 뜻에서 ≪포박자≫를 애독한 사람이 많았다.

1417년(태종 17) 명나라 성조(成祖)가 선음즐서(善陰騭書) 600부를 보내 왔다. 선음즐서는 유·불·도 3교의 사상을 융합한, 선행을 권장하는 책들인데 선서(善書)로 약칭되기도 한다. 권선징악이라는 사회 교육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여 선서가 조선 초기부터 한말까지 계속 널리 읽혔고, 각종 선서의 번각과 언석(諺釋)이 나왔다.

≪옥황보훈 玉皇寶訓≫·≪주생연사묘응진경 注生延嗣妙應眞經≫·≪경신록 敬信錄≫ 및 그 언석, ≪삼성훈경 三聖訓經≫·≪과화존신 過化存神≫·≪감응편도설 感應篇圖說≫·≪공과격찬요 功過格纂要≫ 등이 조선시대에 출간된 주요한 선서들이다.

≪공과격≫은 선행과 악행을 공격(功格)과 과율(過律)로 나누어 계수적으로 규격화하여 사과신적 신앙과 연결시킨 것으로, 민중 도덕을 앙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 선현들에 의한 도교 관계의 저술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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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 정신,몸짓문화뉴스

정통기수련, 치유, 빙의퇴마 www.동학.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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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무예 수박보존회
글쓴이 : 수박삼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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