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조선도교/ 매월당 김시습

사무처 2012. 11. 19. 11:27

조선도교/ 매월당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충절로 이름난 생육신(生六臣)의 대표적 인물로서, 그리고 한국 고소설의 효시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작자로서 많이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가 뛰어난 도인으로서, 그것도 조선 도교의 문호를 여는 개창자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방외인(方外人)으로 살다, 59세에 적멸

 

우선 그의 공적인 생애를 살펴보자. 그는 세종 17년(1435) 강릉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열경(悅卿), 별호는 매월당 이외에도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 등이 있으며 후일 불문에 귀의했을 때에는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세종과 당시 명사들의 신뢰와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어린 그에게 따라 다녔던 김신동(金神童)이라던가 김오세(金五歲)라던가 하는 별명은 그가 얼마나 출중한 재능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가 하는 점을 짐작케 한다.

그리하여 그는 김반(金泮)·윤상(尹祥)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로부터 사사를 받으며 보장된 미래에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도가 양양했던 청년 김시습의 삶은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 인해 크게 굴절되고 만다. 조카 단종에 대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사건이 그것으로 이후 그는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고 중이 되어 반항적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무도한 현실 역사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그는 미친 체하고 방랑하며 기발한 행동과 글로써 위정자들을 질책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강남 지방을 배회하면서 자신의 충정과 격분을 시로써 쏟아내었던 일과 비슷한 점이 있다. 아닌게 아니라 김시습은 달 밝은 밤이면 굴원의 「이소(離騷)」를 읊고 통곡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전국을 방랑하였으나 수락산(水落山)·춘천·설악산·경주 남산 등에 주로 머물러 정양을 하거나 저술 활동을 하였다. 『금오신화』는 금오산이라고도 부르는 경주 남산에서 집필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종 24년(1493) 김시습은 오랜 방외인(方外人)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적멸의 길로 들어서게 되니 향년 59세였다.
죽기 전에 그는 화장하지 말라고 당부하여 중들이 절 곁에 잠시 묻었다가 3년 후에 이장하려고 관을 여니 얼굴빛이 생시와 다름없어 부처가 된 줄로 여겼다고 한다. 마지막의 후일담은 다소 신비스러운 색채가 감돌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삶 자체는 대의명분과 절의(節義)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 근엄한 유학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현실에 절망한 그가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불문의 생활이 그의 삶의 또 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고 할 때 도교 수련가로서의 이미지는 과연 어 디쯤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그의 도인으로서의 삶을 살펴볼 시점에 이르렀다.


내면의 혁명으로 내단(內丹) 수련에 심취

 

김시습이 도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세조의 찬탈이 기정화 되어 그의 현실 정치에 대한 참여 의지가 체념으로 바뀌게 된 시점에서가 아닌가 한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김시습은 설도인으로부터 도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설도인은 곧 설현으로 본래 원(元)나라 사람인데 고려 때 귀화하여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의 권청(權淸)이라는 도인으로부터 도를 배웠다. 이 권청은 권진인(權眞人)이라고도 하며 후일 허균(許筠)과 동시대의 도인 남궁두(南宮斗)에게도 도를 전해 주었다 하니 그는 고려·조선 두 왕조에 걸쳐 수 백년간 생존한 셈이 된다.
어쨌든 다시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설현은 처음 김시습을 춘천에서 만나 그가 선도를 닦을 자질이 있음을 알고 수도를 권유해 보았으나 김시습은 여전히 현실에의 뜻을 버리지 않고 있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수년 후 단종 복위의 꿈이 사라지고 세상에 나갈 희망이 없어진 상황에서 김시습은 산수간을 방랑하다가 한계령(寒溪嶺)에서 다시 설현을 만나게 된다.

결국 현실 변혁의 꿈이 좌절된 김시습은 내면의 혁명을 추구하는 수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고 설현으로부터 선도의 요체를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 때의 일을 두고 읊은 것일까? 다음은 그의 「둥글레 먹는 법을 배우다(學餌黃精)」라는 시의 일부이다.

 

西菴有一老
서쪽 암자에 한 노인이 있어

話我長生道.
내게 장생의 도를 말하였네.

敎我服黃精
내게 둥글레 먹는 법을 가르쳐 주니

僻粒可爲粮.
벽곡으로 식사를 대신한다네.

非唯能久視
다만 오래 살 뿐만 아니라

絶貪身無累.
탐욕 끊어 몸에 해됨이 없다네.

……

子旣世外人
그대는 이미 세상 밖의 사람이 되었으니

須行世外事.
모름지기 세상 밖의 일을 행하게나.
(下略)


마지막 두 구절은 노인이 김시습에게 당부한 말이다. 이제 수양대군에 대한 분노, 단종 복위에 대한 열망은 세상 밖 사람이 된 김시습에게 있어서 모두가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가 해야 할 의미 있는 일이란 '세상 밖의 일' 즉 수련을 하여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수련에 몰두하여 신선의 계제를 밟아가는 삶의 즐거움을 「도연명이 전원으로 돌아가는 시에 화답하여(和靖節歸田園詩)」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晩居城東城
노년에 동쪽 성 모퉁이에 사는데,

水石勝廬山.
경치는 여산보다 낫다네.

卜築依寒巖
차가운 바위 곁에 집을 짓고

窮居逾數年.
몇 해를 어렵사리 살아왔네.

玄豹隱南山
검은 표범은 남산에 숨어있고

神龍襲九淵.
신령스런 용은 깊은 못에 잠겨있는데.


修我玄牝門
나에게 현빈의 문을 닦게 하고

鋤我絳宮田.
강궁의 밭을 김매게 하네.

足以保殘生
이로써 여생을 보내기에 족하니

豈戀浮沈間.
어찌 세상 일에 연연하겠는가?

……

尋芳東澗涯
동쪽 시냇가에서 꽃을 찾고

採藥南山
남산 마루에서 약초를 캐네.

一抛利名場
한 번 명리를 던져 버리니

萬事多閑閑.
만사가 한가롭기 그지없다네.
(下略)

 

동진(東晋)의 저명한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당시 군벌 통치의 작태에 절망, 벼슬살이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전원생활의 여유로움을 노래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김시습은 도연명의 이같은 심경에 공감하듯 화답하는 시를 지으며 구체적으로 수련하는 상황도 읊었다.
'나에게 현빈의 문을 닦게 하고 강궁의 밭을 갈게 하네'라는 구절이 그것인데 현빈문은 좌현신문(左玄腎門)과 우빈명문(右牝命門)의 합자로 콩팥과 명치 부분을, 강궁은 가슴 부분의 중단전(中丹田)을 가리킨다.
결국 이 구절은 내단 수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주적 역사의식을 계승한 『금오신화』

 

순수한 유학자에서 불자로 변신하고 다시 그 위에 도교 수련을 겸하여 김시습의 사상적 폭은 더욱 넓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유·불·도 3교 합일의 성향은 김시습 개인 학문의 특성이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 고선도(古仙道)의 전통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민족 고유의 풍류도(風流道)가 유·불·도 3교의 취지를 다 포괄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전통이 김시습에게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고선도, 즉 풍류도의 또 하나의 중요한 취지는 사대주의를 배격하는 자주적 역사의식이다.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등의 활동에서 보이는 상무적(尙武的), 진취적 기상은 상술한 의식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김시습의 도교사상이 계승하고 있는 자주적 역사의식은 그의 소설 『금오신화』에서 매우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홍생(洪生)이라는 개성 상인이 평양 부벽루에서 신녀(神女)를 만나 고조선 멸망의 역사를 듣고 슬퍼하다가 헤어졌는데 후일 신녀를 그리워하다가 꿈속에서 그녀의 부름을 받고 죽어 시해선(屍解仙)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신녀는 고조선의 왕녀로서 나라가 망해 절망에 처해 있을 때 신선이 된 단군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단군이 선도를 달성한 존재로 신비화되어 있고 소설의 대립구도가 은(殷)과 고조선에 대해서 이들을 멸망시킨 주(周)와 위만(衛滿)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 고선도의 자주적 역사의식을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고구려 동명왕 주몽을 '성제(聖帝)'로 표현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대를 풍미하며 선도의 맥을 이은 기인

 

김시습의 학문에 대해서는 종래 유교와 불교 그리고 문학 방면으로는 연구된 바가 많았으나 도교 쪽으로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았었다. 근래에 이르러 국문학자들에 의해 그의 문학사상에서 차지하는 도교의 비중이 특히 부각되었다. 김시습의 수련 행적 및 도교사상은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권(卷) 3 ,「선도(仙道)」와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 권(卷) 17, 「잡저(雜著)」에 주로 담겨 있다. 「잡저」 중에서도 「수진(修眞)」·「복기(服氣)」·「용호(龍虎)」 편에 그의 도교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는 우선 「수진」편에서 '무릇 신선이란 본성을 기르고 기를 들이마시며 용호를 단련하여 늙음을 물리치는 것이다(夫神仙者, 養性服氣鍊龍虎, 以却老者也)'라고 정의하여 그의 도교가 내단학을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용호란 외단에서는 납과 수은을 가리켰으나 내단에서는 심화(心火)와 신수(腎水), 즉 체내의 불과 물 두 가지 기운을 가리키게 된다.

『해동전도록』에 의거할 때 그는 대체로 종리권(鍾離權)·여동빈(呂洞賓)으로부터 시작되는 전진교(全眞敎) 내단학을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그는 당(唐)의 도사이자 명의인 손사막(孫思邈)의 『천금요방(千金要方)』 「양성편(養性篇)」에서 전개된 호흡법 및 양생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내단학 계통의 기본 경전인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 위화존(魏華存)의 『황정경(黃庭經)』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죽은 지 3년 후에도 그의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는 신비한 후일담은 그가 시해선(시해선)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한국도교사상 그의 불멸의 공적은 그가 고려 중엽 이후 조선 초기까지의 공백기를 깨고 선도의 맥을 다시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후학들에게 계승시켜 조선 중기 단학파의 발흥(勃興)을 가져오게 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홍유손(洪裕孫)에게 「천둔검법연마결(天遁劍法鍊魔訣)」을, 정희량(鄭希良)에게 「옥함기내단법(玉函記內丹法)」을, 윤군평(尹君平)에게 「참동용호비지(參同龍虎秘旨)」 등을 각기 전수하였는데 이러한 기초 위에서 후일 정렴의 『용호비결(龍虎秘訣)』,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이 성립된 것이다.

김시습은 비록 유교로서 입신양명하지는 못하였으나 불승(佛僧)으로서, 혹은 도인으로서 누구보다도 광활한 정신세계를 노닐다 간 한 시대의 기인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에 대해 신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했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본질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스스로를 완성하는 독선기신(獨善其身)의 길을 외롭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외롭지 않았던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의 고결한 삶을 본받고자 하는 뛰어난 후학들이 뒤를 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를 조선 단학파를 개창한 위대한 도인으로 추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다행히 그는 적지 않은 시문을 남겼고 오늘날 우리는 『매월당전집(梅月堂全集)』을 통해 그의 심오하고 드넓은 문학·사상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출처:격월간 정신세계

 

 

 

출처

 

한민족 정신,몸짓문화뉴스

정통기수련, 치유, 빙의퇴마 www.동학.com

출처 : 민족무예 수박보존회
글쓴이 : 수박삼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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