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 후보의 정견발표에 모인 40만 군중(사진 위)과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운구행렬(1956.5.23).
1956년 5월 5일 호남 유세 중 심장마비로 급서
돌이킬 수 없는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가정의 역사가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염원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그때 그랬더라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을 법한 아쉬운 대목이 한둘은 아니지만 안타까운 사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 신익희 대통령 후보의 서거일 것이다. 1956년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역 유세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향년 6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올해는 서거 55주년이 되는 해다.
60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제헌헌법의 기초와 의회제도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던 정치 지도자 해공 신익희 선생은 갑오경장이 일어났던 해인 1894년 6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만 22세이던 1916년 일본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이듬해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해공의 이력 중에는 24세에 계룡산 신도안에서 도사 박해봉에게 도술과 차력술을 습득했다는 특이한 대목도 있다. 이는 차력술과 신통력을 얻어 일제를 깨부수고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에 나서기 위한 신체단련으로 보인다.
이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해방 때까지 26년 동안 임정을 지키며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교부장, 내무부장을 거쳤고 때로는 중국군 육군중장을 겸하기도 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기도 했으며, 한국독립당에 참여해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가깝게 지냈다. 중국에서 그는 왕해공(王海公)이라는 중국식 별호를 쓰기도 했다.
제헌·2대 국회의장 역임하며 의회정치의 뼈대 세워
신익희 선생은 해방을 맞아 조소앙 등과 함께 1945년 12월 2진으로 환국했다. 1946년 대한반공연맹을 결성, 총재에 추대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지부결성과 함께 반공전선에 나섰다. 한편으로 국민대학 초대 학장, 자유신문사 사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해공 선생이 해방정국에서 정치적으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때는 1948년 3월, 김규식에 이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2대 의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다. 이 기구는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남한을 대표하는 입법기관이어서 영향력이 컸다.
1946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정(單政)불가피론’이 제기되자 신익희 선생은 단정불가피론을 받아들여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지지하게 된다. 이는 임정세력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던 이승만에게 큰 힘이 됐으나 임정세력에게는 하나의 이탈로 비쳤다. 임정세력은 남북협상론으로 단정론에 부정적이었다.
신익희 선생이 ‘남한단독정부수립론’을 받아들인 것은 “남북통일정부의 수립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으며 더구나 그 당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갈등과 대립이 칼날 같은 정황에서 처음부터 하나의 정부를 기대하기는 지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했는데 그의 명성이 높아 무투표 당선되었다. 5월 31일에 개원한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 그리고 신익희 의원과 김동원 의원을 각각 부의장에 선출했다. 이승만 의장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공석이 된 국회의장에 해공이 선출됐다.
이 무렵 해공은 자신이 귀국 직후 발족시켰던 행정연구회를 통해 최초로 완성된 형태의 헌법초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헌법초안이 제헌헌법의 뼈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제2대 국회의장으로 재선된 그는 전시 중의 국회를 무난히 이끌어갔다. 그러나 제3대 때는 자유당의 이기붕 의원이 의장이 됐고 해공은 평의원으로 있었다. 제3대 국회 때 이대통령의 비민주적 4사5입 개헌을 계기로 범야세력은 민주당으로 결집해 해공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남도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념”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되는 제3대 대통령선거에 해공은 민주당후보로 나섰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선풍적인 호응을 얻었다. 특히 5월 3일 40여만 명이 운집한 한강백사장 정견발표는 그의 폭발적인 인기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그는 선거일을 열흘 앞둔 5월 5일 새벽 전북 이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해 국민들로서는 정권교체를 눈앞에서 놓친 것처럼 안타까움을 더 했다. 5월 5일 오후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들었고, 일부 군중은 경무대로 향하다 무장경관과 충돌, 발포하면서 사상자가 나는 등 유혈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결과 무효표가 180여만 표가 넘었는데 이는 해공에 대한 추모표로 불린다.
해공 선생은 평소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니 남의 잘난 것도 인정하여야 하며, 나도 잘 살려니와 남도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이다”라고 갈파했다. 요즈음 정치권의 화두인 소통을 해공 선생은 벌써부터 주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_김종해 미디어담당관실 자료조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