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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전호흡,명상수련)비손,차력/한국의 도교 2

사무처 2013. 3. 8. 15:57

도교의 재초와 습속(고려의 도교)

재초의 거행과 그 종류

신라시대에는 왕명에 따라 변이(變異)를 기도로써 물리친 일이 있었다고 하나 어떠한 방법을 따랐는지는 알 수 없고, 도교의 재초가 국가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국가를 위해 소재초복(消災招福)하는 재초 등의 과의적인 도교행사가 자주 열렸고, 심지어는 의종같이 군왕 자신의 개인적인 소재초복을 위해 국비를 기울여 각종의 재초를 번거롭게 지내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듯 고려에서 과의적인 도교가 성행한 데는 고려초 이래 대량 이주한 발해인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발해는 고구려인에 의하여 세워졌으므로 도교를 숭상하던 풍습도 전승되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현종 때부터 재초가 행하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 뒤 예종 때는 재초가 자주 거행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여진다.

옥촉정(玉燭亭)에 원시천존(元始天尊)의 도상(道像)을 안치하고 월초(月醮)를 지내게 한 일이라든지, 도관인 복원궁을 수도에 창건하여 각종의 도교행사를 집행하게 한 일이라든지 하는 것은 예종 때 특히 두드러진 도교숭상 사례이다. 그러나 수련적인 도교는 고려시대에 별로 성행한 것 같지 않아서, 그 방면의 전설이나 설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 거행된 재초의 종류는 천계(天界)를 대상으로 한 호천상제(昊天上帝)·호천오방제·천황대제(天皇大帝)·태일(太一)·천조(天曹)·삼계(三界)·삼청(三淸) 등과, 성수(星宿)를 대상으로 한 남두·북두·노인성·11요(曜)·28수·12궁신·27위신·100신(神)·본명성수(本命星宿) 등과, 재변양제(災變禳除)를 위한 도우(禱雨)·도병·5온신성변기양(五瘟神星變祈禳) 등과 기타 전성제천(氈城祭天)·별공재초(別貢齋醮)·마리산참성초(摩利山塹城醮)·하원초(下元醮) 등이 있다.

이러한 재초에는 그 축문인 재사 또는 청사가 있는데, 그것을 지어 정서한 뒤 국왕이 친서하고 신료가 대독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 이후의 재초에 사용한 청사는 ≪동문선≫에 작자명과 함께 여러 편이 실려 있다. 그 문체는 대체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되어 있고, 내용은 도교의 설법을 곁들여 국왕의 처지에서 재앙을 양제하고 복록을 기원하는 뜻이 있다.

도교 연구와 도관 건립

고려시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도교 전적이 많이 읽혔는데, 그 중 이중약(李仲若)은 도교연구에 남다르게 열중하였던 인물이다. 임춘(林椿)의 <일재기 逸齋記>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도교적인 성품이 있어 ≪도장 道藏≫을 즐겨 읽었다.

청년기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의 월생산(月生山:지금의 月出山)에 집을 지어 일재라 하고 세속을 떠나 거기에서 ≪황정경 黃庭經≫ 같은 도서를 읽으며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도교수련과 직결되는 의술도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의 의술이 알려져 숙종의 병을 시술하도록 불려 갔으나 궁궐에 도달하였을 때는 숙종이 이미 운명한 뒤였다.

예종이 그를 좋아하여 궁중에 머물러 있게 하며 도교의 요리(要理:중요한 교리)로 응대하고 지냈다. 그 뒤 그는 바닷길로 송나라로 건너가서 황대충(黃大忠)으로부터 직접 도요를 전수받고 도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돌아왔다.

귀국 후 이중약이 예종에게 상소하여 현관(玄館:도교사원)을 설치하여 국가 재초의 복지(福地)로 삼도록 한 건의가 받아 들여져 건립된 것이 복원궁이었다.

이중약은 복원궁의 강석(講席)에서 큰 종을 울려 도교의 요리를 가르쳤는데, 그것을 배우러 모여든 사람들이 문을 메웠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복원궁은 왕부의 북쪽 태화문 안에 있었고, 전내(殿內)에는 삼청상(三淸像)이 그려져 있었으며, 공행이 높은 도사 10여 인이 그곳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이들 도사는 관원같이 낮에는 복원궁에서 일을 보고 밤에는 사실(私室)로 돌아가곤 하여 계율을 지키지 않아 속인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 땅에 도교 교단이 성립되지 않은 원인을 이런 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송나라 휘종(徽宗)은 1110년(예종 5) 중국 도사 2인을 신사(信使)로 딸려 보내 고려에서 도법에 통달한 자들을 골라 지도해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고려에는 도교 교법과 의식에 조예가 있는 인사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또, 1118년 송나라 휘종이 보낸 의관 7인이 고려에 와서 2년 동안 고려의 의학인들에게 중국의학을 가르쳐주어 고려의 의약행정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도교의학도 도입되어 이 땅의 의약전통에 참여하기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도교습속

고려시대 도교의 장생법과 사과신적(司過神的) 신앙에서 생겨난 수경신(守庚申)의 습속이 상하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수경신은 경신수야(庚申守夜) 곧 경신일마다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습속이다. 도교에서는 사람마다 주어진 수명은 2주갑, 즉 120세인데 그가 저지르는 악행의 정도에 따라 그 비례로 수명이 단축된다고 본다.

사람은 악행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기는 어려운데, 삼시충(三尸蟲)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인체 내에 기생하면서 그 숙주(宿主)가 저지른 악행을 살펴 60일마다 오는 경신일 밤 숙주가 잠든 사이에 빠져 나가 천제에게 그것을 고해 바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례보고를 막기 위해 삼시충이 체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경신일 밤을 자지 않고 지새우는 것이 수경신이다.

밤을 새우는 일은 무료하므로 주연을 벌여 노는 축제 성격을 띠게까지 되었다. ≪고려사≫ 1265년(원종 6) 4월조에 ‘경신일에 태자가 안경공(安慶公)을 맞아다가 잔치를 베풀고 날이 샐 때까지 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경신일에 수야하는 습속을 태자까지 따른 것을 지탄한 것이다.

이러한 수경신의 습속은 조선 초에 이르는 동안 1년의 6경신을 다 수야하는 일은 줄어 들고, 연말 무렵의 마지막 경신일을 철야 축제행사로 지키게 되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경신수야의 습속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제가의 문집에 경신수야를 읊은 한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도교비판과 그 변천(조선의 도교)

과의적인 도교의 존속

조선시대에 와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도교가 신봉되어 대체로 고려의 유제(遺制)를 계승하였으나 그 규모가 축소되었고, 중도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에 따라 국가 중심의 도교의식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1392년(태조 1)에는 예조에서 고려 때 쓰던 복원궁·신격전·구요당·소전색·대청관·청계배성소 등 재초거행 장소를 폐지하고 송도에 있는 소격전(昭格殿) 한 군데만 두기로 하였다. 한양에 천도한 뒤인 1396년 초 정부(丁夫) 200인을 징발해서 한양에 소격전을 영조하였다.

1417년(태종 17) 소격전 제조로 있던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도교의 사전(祀典)을 상정(詳定)하도록 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소격전을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소격서는 도교 재초를 거행하는 국가의 관서여서 그 직제는 제조 이하 서원(署員) 8인과 도류(道流) 약간인 및 도학생 10인으로 되어 있었고, 도류의 공과(功課)와 도과(度課)의 제도가 있었다.

도류취재는 ≪금단 禁壇≫을 낭송시키고 ≪영보경 靈寶經≫을 읽히며, 과의는 ≪연생경 延生經≫·≪태일경≫·≪옥추경≫·≪진무경 眞武經≫·≪용왕경≫ 가운데 3경으로 하였다.

그리고 소격서에는 태일전·삼청전 및 내외 제단이 있어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에 이르는 도교 제신의 신위를 마련하고, 헌관·서원 및 도류가 분담하여 재초를 종합적으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설에는 소격서에 직수전(直宿殿)과 십일요전도 있었다고 한다. 집행된 재초의 종류는, 성신(星辰)을 제사하는 성수초, 태양성 및 화성초, 남·북두초, 금성초·태음초·진무초·직성초·형혹기초(熒惑祈醮)·혜성기초 등이 있고, 그 밖에 개복신초·청명초·도병초·기우초·본명초재·진병초·삼원초·삼계초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연산조에 소격서가 일단 형식적으로 혁파되었으나 재초는 여전히 집행되었고,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가 주도하는 신진사류들이 소격서의 혁파와 왕의 천지신 제사 중지를 끈질기고 격렬하게 고집하여 1518년(중종 13) 소격서를 혁파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행사는 참성초라 하여 도교의 재초로 거행되었고 소격서 혁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지식인들의 도교에 대한 태도

태종은 도교의 재초에 관심이 깊었고, 수련적인 도교에 대해서까지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김첨과 공부(孔俯) 두 사람이 도교에 관련된 일로 태종을 도왔다.

김첨은 고려 말부터 벼슬을 하던 사람으로 도교궁관의 시설과 재초의 의례에 밝았다. 김첨은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부흥시키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 목적은 결국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구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 이래 국가에서 도교를 숭봉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하겠다. 그의 재략과 외교상의 공로를 생각하여 태종은 그를 버리지 않고 제례 등에 관해 그에게 자문하기도 하였다.

1404년 김첨이 성수초제를 상정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는 대청관(大淸觀)을 수리해서 천황대제를 초제하려고 하였으나, 권근(權近)과 하륜(河崙)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해 태종에게 상서하여 과의적인 도교를 국가적 차원에서 숭봉할 것을 간곡하게 권하기도 하였다. 1408년 소격전의 제조로 있던 공부를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딸려 보내 당시 중국의 도교 초사(醮祀)의 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공부는 서장관으로 가기 전에도 이미 중국에 다섯 차례나 다녀와 중국의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였던 것 같고, 수선(修仙)이라 자호한 것으로도 그가 도교에 대해 많은 흥미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 동남(童男)을 거느리고 기우제를 지낸 일도 있다. 태종은 1413년 수진지사(修眞之事:도교의 법에 따라 불로장생하는 도를 닦는 일)를 묻기 위하여 아버지의 상중에 있던 그를 불러다 만나기까지 하였다.

중종 때 신진사류들은 소격서 혁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왕실측과 무섭게 대립하여 간접적으로는 기묘사화의 불씨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들의 상소는 “도교가 이단이고 허황되며 망령스럽고, 도교를 극도로 숭봉하던 당나라 현종(玄宗)이나 송나라 휘종은 오히려 앙화를 입고 수명을 연장할 수 없었다.”고 하여,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교를 정도로 내세우고 도교를 사악한 이단으로 몰아 유도의 정맥을 뿌리 내리는 일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제신앙(關帝信仰)이 흘러 들어와 관왕묘(關王廟)의 건립을 보게 되기도 했지만 과의적인 도교는 쇠퇴하였고, 성리학을 표방하는 지식인들은 표면적으로 도교를 이단으로 물리치는 태도를 취하였다.

민간의 도교

수련적인 도교의 도맥에 들어 있는 조선시대의 인물들을 비롯해 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의 기행과 이적에 관한 기사가 ≪어우야담≫·≪오산설림≫ 등 각종 만록에 보이는 데, 그러한 기사들을 단학설화로 합칭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권경중(權敬中) 같은 사람은 신선벽곡지술(神仙辟穀之術)을 배웠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서도 신선수련술을 좋아한 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 중 홍만종(洪萬宗)은 자신이 신선·도술에 기울어 다시 ≪야사제집≫에서 단가이적의 기사를 집성하여 ≪해동이적≫을 내기도 하고, 그의 만록인 ≪순오지 旬五志≫에도 신선·도술에 관한 기사를 많이 수록하였다.

홍만종의 경우도 자신의 건강유지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겨지지만, 본래 도교의 수련은 양생법과 직결된다.

도학자들까지도 그 점은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한편, 민간에는 직성기양(直星祈禳) 같은 성수와 연결된 행사와 습속이 적지않았다. 도교에서 다루는 성수 중 주요한 것은 칠정사요(七政四曜)·남두육성(南斗六星)·북두칠성이다. 그 중 남·북두에는 모든 사람의 궁함과 통함[窮通], 안락과 근심걱정[休戚]이 다 달려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북두가 더욱 존숭되는데, 그것은 지금의 북두칠성과는 달라서 북신성(北辰星), 즉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일곱 개의 별을 말하는 것으로 그 존숭의 핵심은 북극성에 있다.

북극성은 군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록빈부와 생사화복을 위시한 모든 명운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옥추경≫은 북극성 경배의 진원이고, 또 의약과의 관련이 있어 옥추단이나 벽사문(辟邪文)으로 예방하는 습속이 생겨나게 하였다.

이 밖에 민간에는 삼재예방, 방위의 길흉, 동토 및 입택의 방법 등 인간만사에 부수되는 예방과 선택에 도교적인 풍습이 있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맹인, 즉 판수가 독경해서 민간의 제반사를 지시, 해결해 주는 구실을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결국 도교의 잡술을 맹인이 시행한 사례로, 거기에는 토속과의 합유(合糅)현상도 적지 않았다.

한 때는 명통사(明通寺)를 총본부로 하여 계층이 뚜렷한 맹인들의 조직이 있어 도사 중심의 도교교단과 비슷하였다.

도교의 전적과 양생론

도교의 양생론

도교의 수련은 건강을 유지하여 장수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므로 그것은 곧 양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이론상으로는 불로장생을 꾀하는 것을 반박하였으나, 그의 잡저 <수진 修眞>과 <용호 龍虎>에서 도교수련법의 요체를 천명하였다.

<수진>에서 ‘신선이란 양성복기(養性服氣)하고 용호를 수련해서 늙음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라고 전제하고 ≪양생결≫을 인용하여, ‘본성을 기르는 사람은 늘 약간의 노력을 원하나 지나치게 무리한 행위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고 일러 주고 기행좌와(起行坐臥)에 걸친 주의사항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에 걸쳐 과도한 짓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정(精)을 동요시키지 않고 마음을 적묵(寂默)으로 돌아가게 하면 장생하게 될 것임을 말하였다.

≪용호≫에서는 수련해서 장생하는 것은 천지의 정기(正氣)를 훔쳐내는 것임을 말하고, 그 요체는 호흡을 통하여 음진양순(陰盡陽純)해짐에 있고 공행이 차면 장생초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일종의 양생론이다. 한편, 주희(朱熹)가 ≪참동계 參同契≫와 ≪음부경 陰符經≫ 같은 도서에 관심을 갖고 교주(校注)작업을 한 것 등에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까지도 그러한 부류의 도서를 기탄 없이 열람하였고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사들도 나왔다.

이렇게 해서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심신수양, 건강관리, 또는 생활의 운치 등 다양한 의의를 도교적인 수련법에 부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종교적인 의의가 극도로 희석된 상태에서 수련적인 도교가 받아 들여지기도 했다.

이이(李珥)도 도교적인 방법을 감안한 의약책을 피력하였다. 그는 도교의 연단·등선의 설은 믿지 않으나, 도교에서 개발한 창양(昌陽)·황정(黃精) 같은 연년익수(延年益壽:수명을 더 오래 늘여 나감)한다는 약물의 사용은 그것 나름의 이치가 있어 받아들일 만하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유교적인 효행이 강조되던 시대이므로 사친양로(事親養老:어버이를 섬기며 노인을 부양함)를 위하여 지식인들이 도교의 양생론과 의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황(李滉)도 이찬(李澯)의 8폭 양생설을 보고, 주희가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를 사랑하는 뜻을 알게 되었고, 자기인들 양생하여 지선(地仙)이 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의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의식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도교의학

정렴(鄭Ꜿ)은 ≪북창비결≫이라고도 하는 그의 저서 ≪용호비결≫ 제1장에서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을 설명해 나가는 도중에 정기를 머물러 있게 하여, 풍사가 파고들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방비하는 일종의 건강관리법과 양생법을 말하였다. 그리고 질병이 생겨난 뒤 의사를 찾아가 약을 쓴다 하여도 이미 늦는다고 하였다.

그 착상법은 근대의학적 처지에서도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양생론이나 보건법은 확대 세련되어서 조선시대 의학의 기본 체계를 확립시키기에 이르렀고, 나아가서는 의학의 본의를 해명하는 데까지 전개되었다. 조선시대는 의서의 번각교주 및 언해가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중 ≪동의보감≫은 그 체계 정립에 도교의 철리가 솔직하게 받아 들여졌고,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도교의 특성이 의약의 본의 천명에 적용되어 있으며, 심지어 도교 잡술에 속하는 방법까지 소개되어 있다.

≪동의보감≫ 내경편(內景篇) 집례(集例)에 “도교에서는 청정과 수양을 근본으로 삼고 의문에서는 약이(藥餌)와 침구로 치료를 한다. 이는 도는 그 정(精)을 얻었고, 의는 그 조(粗)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견해를 살린 정연한 구성 밑에서 동양의약에 흔히 있는 허황하고 공상적인 의학론은 극력 배격하고, 의학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의 이치를 파악하여 당시 의학계의 온갖 지식을 총집결하고, 그 의의의 해명에는 도교의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정신을 취하여 편찬한 것이다.

내경편에서는 도서를 많이 인용해서 신형(身形)과 정(精)·기(氣)·신(神)을 설명하고 의자는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보양, 치료할 것을 강조하였다.

외형·잡병·탕액·침구 제편은 실제에 맞는 일반적인 이론과 공평한 치료방법을 제시하기에 힘썼다. 본말과 정조의 구분이 엄연한 체계에 따라 편찬된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허준(許浚)의 주편으로 1612년(광해군 5) 내의원에서 그 초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의 편찬에 정렴의 아우 작(碏)이 참여하였으므로 정씨 형제의 도교적인 의학관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의 의서 가운데 도교적인 관점에서 쓰인 것이 많다. 이종준(李宗準)의 ≪신선태을자금단방 神仙太乙紫金丹方≫, 박운(朴雲)의 ≪위생방≫, 정유인(鄭惟仁)의 ≪이생록 頤生錄≫, 정사위(鄭士偉)의 ≪이양편 二養編≫, 이창정(李昌廷)의 ≪수양총서유집 壽養叢書類輯≫, 최규서(崔奎瑞)의 ≪강기요결 降氣要訣≫,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중 <보양지 葆養志> 등은 다 그러한 의서들이다.

도교의 전적과 그 연구

기록상으로는 고려 중엽의 이중약이 ≪도장≫을 읽은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유당학인들이 많은 도서를 도입한 것으로 전해지므로 그때 ≪도장≫이 이 땅에 들어 왔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규장각도서에 ≪정통도장 正統道藏≫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들여온 것이라 여겨진다.

신라 말기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진 ≪참동계≫는 ≪주역≫과 황로(黃老)와 노화(爐火:금단 연조) 세 가지의 요체를 융합하여 묘치 있게 대도를 터득한다는 뜻을 나타냈다는 도서로 후한 위백양의 저술이다.

이황도 장수를 희구하는 견지에서 ≪참동계≫에 큰 관심을 표명하였고, 권극중(權克中)은 ≪참동계주해≫를 펴냈으며, 최석정(崔錫鼎)과 민이승(閔以升)도 ≪참동계≫를 비롯한 도서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정경≫도 주요 도교경전의 하나로 양생의 요결을 다룬 것인데 우리 나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음부경≫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해서 그것을 운용하는 묘리를 쓴 것으로, 역시 우리 땅에서 많이 읽힌 도교경전 중의 하나이다.

≪옥추경≫은 위작으로 고증되기는 하였으나,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속된 내용 때문에 조선 초기에도 송독되었고, 1733년(영조 9)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개간한 조선각본도 있다.

≪포박자 抱朴子≫도 도교경전의 하나로 편입되어 있는데, 우리 선현들 중 건강과 장수를 희구하고 아울러 인생의 운치를 돋우는 뜻에서 ≪포박자≫를 애독한 사람이 많았다.

1417년(태종 17) 명나라 성조(成祖)가 선음즐서(善陰騭書) 600부를 보내 왔다. 선음즐서는 유·불·도 3교의 사상을 융합한, 선행을 권장하는 책들인데 선서(善書)로 약칭되기도 한다. 권선징악이라는 사회 교육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여 선서가 조선 초기부터 한말까지 계속 널리 읽혔고, 각종 선서의 번각과 언석(諺釋)이 나왔다.

≪옥황보훈 玉皇寶訓≫·≪주생연사묘응진경 注生延嗣妙應眞經≫·≪경신록 敬信錄≫ 및 그 언석, ≪삼성훈경 三聖訓經≫·≪과화존신 過化存神≫·≪감응편도설 感應篇圖說≫·≪공과격찬요 功過格纂要≫ 등이 조선시대에 출간된 주요한 선서들이다.

≪공과격≫은 선행과 악행을 공격(功格)과 과율(過律)로 나누어 계수적으로 규격화하여 사과신적 신앙과 연결시킨 것으로, 민중 도덕을 앙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 선현들에 의한 도교 관계의 저술이 적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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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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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손수련, 호흡(기차), 산차, 영성.신명공부, 우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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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무예 수박보존회
글쓴이 : 수박삼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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