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단전호흡,명상수련)비손,차력/한국의 도교
한국의 도교
도선비결
신라말 고려초에 승 도선이 지었다고 한다.
[한국의 도교]
한국 도교의 성격
단군신화와 신선설
중국 신선방술의 발생과는 별도로 우리 나라에는 고대로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토착적인 고유 문화현상으로서 산악신앙·신선설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의 방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고대의 건국신화가 산악신앙 및 신선사상과 직결되어 있으니, 단군신화를 보면 그것을 곧 알게 된다.
천제 환인(桓因)의 지차아들인 환웅(桓雄)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강림한 곳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이었다. 환웅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을 본원으로 하여 이 땅 특유의 신선사상이 전개되고 이 땅의 선파(仙派)가 생겨나게 된다.
단군신화에 언급된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은 한국신선사상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고, 후세 선파에서 내세운 환인과 환웅으로 연결시킨 단군의 정신과 교훈은 인간만사의 도리와 우주삼라만상의 이치를 두루 포괄하는 것이었다.
‘결청지학(潔淸之學)’·‘연양지도(鍊養之道)’·‘인간선사(人間善事)’·‘신도묘덕지훈(神道妙德之訓)’ 등의 용어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환인의 도가 환웅과 단군을 거쳐 전해져서 그것이 다시 문박씨(文朴氏)·을밀(乙密)·영랑(永郎)·안류(晏留)·보덕성녀(普德聖女) 등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선가설은 퍽 오래 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선파로 지목된 인물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져 내려 온 것 같은데,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불우한 은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선파 사이에서는 중국의 지배를 배격하는 주체적인 사관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고, 중국문화로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며 자주적인 문화의 건설을 모색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무한한 저력에 대한 신심과, 우리 겨레가 세계를 영도하는 지위에 오를 영광된 장래가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선과 결부시켜 예술가를 경애하는 등 우리 고유의 선가설과 관련된 특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은 그 전승과정에서, 수련적인 도교와 습합하면서 변천하여 내려 왔다. 따라서 이러한 신선사상은 도교적인 문화현상으로 간주하여 한국 도교의 특징의 하나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의적 도교
이 땅에 도교가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고구려 말기였고, 그것은 주로 국가를 위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禳災祈福] 재초(齋醮)를 중심으로 한 과의적(科儀的)인 도교였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대륙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 큰 판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도입해 당시의 고구려 사상계를 개편함으로써 정권을 성공적으로 확보하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큰 판도를 지탱해 나가는 국력을 길러 중국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토멸한 뒤 신라는 고구려가 차지했던 대륙의 강역은 당나라에 빼앗기고 장악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조사로는 국가를 위하여 양재기복하는 도교의 재초가 신라에서 행해진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도교의 재초가 극히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예종 때에 와서는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는 등 국가적 종교로서의 도교가 강화되었다. 대외정책도 한때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국을 창건하고, 고려는 발해의 혈통을 이어 결국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도교와 관련시켜 볼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과의적인 도교가 국가의 비호 아래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유신(儒臣)들 사이에서는 한낱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 조선에서 하늘을 제사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 하여 도교의 재초를 극렬하게 반대하였고, 대단한 논란이 되풀이된 끝에 소격서(昭格署)가 혁파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도교와 대판도주의는 상관관계가 없지 않으리라는 견해도 있는데, 그것은 대체로 과의적인 도교의 기복을 배경으로 도출되었으므로 과의도교는 한국 도교의 한 특징으로 꼽히게 된다.
수련적 도교
한국 도교의 세 번째 특징으로 수련적인 도교가 우리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수련적인 도교는 신라 말기 유당학인(留唐學人)들이 당나라에서 도입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땅의 도맥도 이로부터 형성되었다.
이 도맥을 보면 신라 때는 최치원(崔致遠)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고려시대는 비약이 심하여 보잘 것이 없으며, 조선 초기로 내려와서는 김시습(金時習)이 중흥시조 같은 지위를 차지하여 그 전승이 뚜렷해진다.
불로장생 같은 현세적인 이익의 추구가 그 중심이 되는 도교에서 수련을 통해 불로장생을 획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것들은 결국 마음의 평정과 신체의 건강에 이바지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적인 도교는 우리의 옛 지식인들에게 어느 면으로는 인생의 운치나 위안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동시에 좋은 건강관리법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들은 수련적인 도교에 양생법이 있음을 인식하고, 심지어 이황(李滉)·이이(李珥) 같은 학자들까지 그것을 받아 들여 실생활에 응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도교에서는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수련을 통한 건강관리법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특한 의학을 수립하기까지 하였다.
도교의학은 고려시대에 이미 들어온 바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리 의학이 도교의 이론에 따라 철저하게 체계화되었다. 도교에서는 예방의학이 대단히 강조되어, 평소에 신체의 조화를 깨서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생활하는 것이 최상의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도교적인 의학사상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의서인 ≪동의보감≫ 편찬에 수용되어 엄연한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도교의 수용과 그 전개
오두미도 五斗米道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인용된 <고구려본기>의 기사에 따르면 7세기 전반에 고구려인들이 다투어 오두미도를 신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땅에서 오두미도가 시작된 지 거의 5세기가 지난 때였으므로 그것이 들어온 경위가 문제이다.
중국의 도교는 후한 말기를 전후하여 성립한 태평도(太平道)와 천사도(天師道)를 조형(祖型)으로 형성되었는데, 천사도는 곧 오두미도의 교법과 조직을 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오두미도란 입교자에게 쌀 닷말씩을 바치게 한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후한 환·영제(桓靈帝) 때 장릉(張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구려에서 7세기경 민간에 오두미도가 성행한 이유를 지금으로서는 상세하게 살펴볼 방도가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 고국천왕 19년조에, ‘중국이 크게 혼란해져 한인(漢人)이 난리를 피하여 내투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그것은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197)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때 내투한 중국인이 오두미도를 가져왔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장로가 오두미도를 정착시킨 시기보다 이르고, 태평도의 교주였던 장각(張角)과 동시대의 사람인 장수(張脩)가 만든 초기의 오두미도가 피난민과 함께 고구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 때 유입되었다면 고구려의 오두미도 신봉의 역사는 퍽 길어진다.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6세기 초 중국에서 천사도로도 불리는 오두미도가 중국의 연안지대를 거쳐 민간을 통해 고구려에 전파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고구려에서 신봉되었다는 오두미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규모의 대소는 어떻든 간에 신도들을 통할하는 조직이나 기구가 존재하였을 것이고, ≪도덕경≫의 송독, 삼관수서·부적·기도 등도 시행하였을 것이다.
도교의 도입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따르면, ‘영류왕 7년(624)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니, 영류왕은 나라사람들과 함께 그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도교가 정식으로 고구려에 전래하였으나 그것이 국가적인 종교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그 뒤 20년이 경과하여 643년(보장왕 2) 당시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숙달(叔達) 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와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유교·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보장왕은 불교 사찰을 도관으로 만들어 도사들을 그 곳에 거처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여러 도교행사를 곁들여 국가를 진호하는 재초를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도교가 고구려에 정식으로 도입되었고, 도교가 국가를 진호하는 소임을 담당하는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연개소문이 도교 강화책을 쓴 데는 고구려에서 유·불의 세력을 감쇄시킬 기도도 있었겠으나, 도교를 숭상하는 당나라의 종교정책이나 문화정책과 맞서 보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본전(本傳)에 인용된 바와 같이 그가 국왕에게 고한 말에 “듣건대, 중국에서는 삼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아직도 빠져 있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것을 음미해 보면 그러한 의도를 읽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보장왕 본기의 기사에도 “삼교는 마치 세 발 솥의 발 같아서 하나가 없어도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 흥왕한데, 도교는 아직도 성하지 않으니 이런 상태로서는 천하의 도술을 다 갖추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전부터 민간의 오두미도 신봉이 있었으며, 20년 전 영류왕 때 도사·천존상·도법 및 ≪도덕경≫의 전래가 있었고, 또 보장왕 때에는 도교가 국가의 종교로 강화되었으니, 고구려에서 도교는 생소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양의 성세(城勢)가 반월성이어서 국세의 위약을 나타낸다 하여 도사들이 나서서 주축(呪祝)으로 상제(上帝)가 남하룡(南河龍)에게 조칙을 내려 그것을 만월성으로 가축(加築)하게 하고, 그것을 용언성(龍堰城)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도교를 이용한 심리전략이었다고 하겠다.
불교측의 반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국가 종교의 주도적인 지위에 올려 놓은 일은 마치 5세기 중엽에 북위(北魏)에서 최호(崔浩)가 태무제(太武帝)를 귀의시켜 구겸지(寇謙之)가 영도하는 신천사도(新天師道)로 정비된 도교를 국가 종교로 굳게 자리잡게 하고, 이어 그때까지 지반을 굳히고 있던 불교를 탄압한 선례를 재연한 듯한 느낌을 준다.
유교와는 종교적인 색채가 그리 짙지 않고 사찰을 빼앗기는 따위의 피해도 없었으므로 큰 충돌이나 마찰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종교적 지반을 굳히고 있었던 불교는 도교의 본격적인 도입과 그 강화로 인해서 극심한 타격을 받았으므로 불교측은 도교 강화책에 대하여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승려 보덕(普德)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던 반룡사(盤龍寺)에 거처하던 당시 불교계의 영도자였는데, 그가 “좌도(左道:도교)가 정도(正道:불교)에 맞서서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짐을 슬퍼하여 누차 국왕에게 간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고 한 것이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기록되어 있다.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도교 강화책을 반대한 것은 핑계였고, 실상은 불교의 탄압에 항거하고 나선 것이라고 하겠다.
보덕은 평양에서 전주로 남하할 때 신력(神力)을 발동시켜 방장(方丈:거처하는 암자)을 날려서 단숨에 고대산(孤大山)까지 옮겨 갔다고 한다.
이렇게 고승이 신력을 발휘했다는 고사는 도교측의 도력(道力) 과시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도교 강화책의 여파로 보덕과 같은 사례가 많이 생겨, 불교는 고구려 이외의 나라에 전파되었다.
수련적 도교와 방술(신라의 도교)
도교의 잡술
신라시대는 도교의 잡술을 연상시키는 기적을 나타내고 신이한 방술을 구사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신라 초의 호공(瓠公)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도와 인접국과 수교의 사명을 수행하여 신라의 국위를 떨친 인물인데 바람과 비, 새와 짐승을 마음대로 부리는 대단한 방술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에 관해서도 방술의 신비성을 띤 설화가 ≪삼국사기≫ 권41∼43의 본전과 ≪삼국유사≫ 김유신조 등에 전한다.
김유신은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는데, 그것은 칠요(七曜)에서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하여 생래적으로 신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그는 17세 때 이미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통삼대공(統三大功)을 성취할 힘을 내려 주기를 기도했는데, 신이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요청대로 방술의 비법을 전수했다.
그 뒤 또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천관(天官)에게 빛을 드리워 자기 보검에 강령(降靈)해 달라고 비니, 두 별에서 광채가 내려와 그의 보검을 동요시켜 신령한 기운을 내려 주었다.
김유신의 보검은 고구려군과의 접전에서 신비한 위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항시 음병(陰兵)의 호위를 받고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김유신에 관련된 신이한 설화들은 도교적인 색조가 농후하고 도교의 잡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김유신의 증손 김암(金巖)도 방술을 좋아하여 숙위(宿衛)로 당나라에 가 있을 때 도교 방술에 포괄되는 음양가법을 배우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터득하였다.
그는 귀국 후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로 팔진병법(八陣兵法)을 가르쳤으며, 하늘에 빌어 메뚜기의 재해를 물리치는 등 방술을 구사하였다.
이 밖에도 신라시대는 시가(詩歌)와 결부된 이적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월명사(月明師)가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해가 둘 나타난 괴변을 없앴고, 융천사(融天師)가 <혜성가 彗星歌>를 지어 혜성을 없애고 침범해 온 왜군을 제발로 물러가게 하였다는, 향가를 둘러싼 전설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을 방술만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방술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나말 학인들과 도교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 가운데 수련적인 도교를 이 땅으로 전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동전도록≫ 같은 우리 나라의 도서(道書)에 그 경위가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처에 도교 사원인 도관이 건립되어서 국가나 개인이나 양재기복하는 재초, 곧 과의적인 도교의 제례행사가 매우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그래서 당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에게는 도관의 재초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도교의 재초에 사용하는 제문이나 축문은 재사(齋詞)니 청사(靑詞)니 하여 불가의 도량문(道場文) 등과 구별된다.
최치원과 같이 한때 당나라에서 벼슬을 살면서 문한(文翰)을 다루던 사람은 당나라에 있을 때 이미 적지 않은 재사나 청사를 짓기까지 하였고, 그 글이 문집 등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의 학인들에 의해 수련적인 도교가 이 땅에 이입되었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견해라고 할 만하다.
9세기 중엽 신라의 학인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와 승려 자혜(慈惠) 등 3인이 중국에 유학하여 종남산(終南山) 광법사(廣法寺)에서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를 만난 것이 기연이 되어 신원지의 알선으로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청화비문 靑華祕文≫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도서(道書)와 구결(口訣)의 전수를 받았고, 3년 동안 수련한 끝에 단(丹)을 이룩하였다.
여기에서 단을 이룩하였다고 한 것은, 신선이 되는 약인 금단연조에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라, 심신의 수련을 통한 공행이 양전한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말한다.
김가기는 한때 신라에 다녀갔으나 ≪속선전 續仙傳≫ 등의 기사를 보면 858년 2월 25일 당나라에서 백주에 신선이 되어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보다 11년 뒤인 869년 당나라에서 유학한 최치원과 역시 유당학인인 이청(李淸)에게 김가기가 구결을 전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승우는 신라로 돌아와 태위(太尉) 벼슬까지 지냈는데, 그도 귀국하여 최치원과 이청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93세의 장수를 누렸다.
자혜는 의상(義湘)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맞는 견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는 귀국 후 오대산으로 들어가 승려 명법(明法)에게 도요(道要)를 전수하고 145세에 태백산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환인 이래, 이 땅 고유의 도맥 이외에 유당학인을 통해 수련적인 도교가 흘러 들어와 새로운 도맥을 이어 나가게 된 것이다. 최치원은 김가기와 최승우 두 선배로부터 도요를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자혜의 계통에 속하는 권청(權淸)과도 접촉이 있어 도법을 연마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당학인이 이 땅에 형성한 새로운 도맥은 고려와 조선에까지 전승되었는데, 그 계보는 최치원에서 직접 뻗어나가지 않고 이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갔다. 이청은 명법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명법은 다시 자혜로부터 도요를 배운 뒤 권청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최치원과 도법을 연마한 뒤 그것을 후대에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들어온 수련적인 도교는 기인괴사들의 단학설화(丹學說話)도 생겨나게 하고, 도교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기풍을 조성해서 일반 학인들이 흥취를 구하는 한 가지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수련적인 도교의 전승
≪해동전도록≫은 규장각본에 조선 중기의 한무외(韓無畏)가 기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무외는 곽치허(郭致虛)로부터 도요를 전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곽치허가 그에게 한 부탁이 “정양(正陽)의 한 줄기 맥이 실추되지 않으리니 힘쓰고 힘쓰라.”로 맺어져 있다. 정양은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종리권의 존호이다.
본성적인 단학은 중국에서는 금대(金代)에 성립된 도교의 한 종파인 전진교(全眞敎)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전진교에서는 여동빈(呂洞賓)을 종조(宗祖)로 받드는데, 여동빈은 종리권의 전수로 득도하여 선화(仙化)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전진교에서는 종리권을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존칭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전진교의 성립은 12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금대에 내려와서이므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본성적인 단학을 중심으로 한 도교를 수련한 일을 전진교와 결부시켜 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전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내단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의 일파가 당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그 계통의 도교와 접촉을 갖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따진다면, 그러한 도법이 유당학인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은 전혀 무근한 일이고, 금대에 시작된 전진교의 한 분파의 교법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중국에서 들어온 뒤 이 땅에서 그 계통의 도맥을 소급 설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내력을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전승한 단학은 환반지학(還返之學)과 시해(尸解)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나, 전수된 도서와 저술된 도법은 다양하다.
수련적인 도교에서의 환반의 뜻은 금단 연조에서의 칠반구환(七返九還)의 법을 본성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대체로 심신·성정·육체에 걸쳐 분산된 정력을 수습해서 응집된 상태에서 유지, 보존하여 장생불로에 이르게 하는 수련방법이라 하겠다. 시해는 도법을 수련한 끝에 죽는 형식만을 빌려 신선이 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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