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한국고유무술 수박의 맥을 따라서(대한수박협회)

사무처 2018. 11. 23. 14:32


 

 

[수박춤의 맥을 따라서] 

저자명/ 송준호 
학술지/ 예술부산. 통권 제60호(2009년 3/4월), pp.56-60 
출처/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광역시연합회 
문서유형/ 학술지논문 
발행일/ 2009 
발행국가/ 한국 
발행언어/ 한글 
청구정보/ 705 ㅇ259 
***2009년 1,2월 3,4월 합본호에 2회로 나누어 게재되었다. 원제는 수박의 맥을 따라서 였으나 예술지인 관계로... 아직까지 사회통념상 武는 藝가 아닌 모양이다. 그 책임은 관계되는 모두에게 있을것이다. 원문은 국회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아래는 교정전의 것이다.

<<手搏의 脈을 따라서>>

[들어가며...] 

공자는 일찍이 40을 不惑이라 했다 한다.
그런 모양이다. 그 나이쯤 되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불혹...
논어 위정편에 나온다는 이 말은 공자가 나이 들어 자신을 돌아보며 한 소리란다.
적어도 공자가 살던 그 시기에는 40정도 되면 세상사에 惑됨이 없어야 그나마 사람취급을 받았을게다. 지금도 별 반 다르진 않겠지?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40은 인생에서 불혹이 아닌 신문이나 잡지따위에 덧붙여진 附錄같음은 왜일까... “공자님이 그랬던가 사십이 불혹이라고 나한텐 육십고개도 미혹이건만...”이라 했던 [미망]에서의 박완서선생이 남 일 같지 않음이라...

어쨌거나 불혹이 되어 힘겹게 뛰어 온 지난일들을 돌이켜 보고 홀로 흐뭇 해 하진 못할망정 부록으로라도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迷妄의 나를 잠시 반추 해 본다. 그 끝자락에 手搏이란것이 걸려 있기에...

언젠가 sbs 방송국의 예능작가인 유은혜씨가 나에게 물어 본 것이다. 고개를 거북이 머리마냥 ‘쑥’ 빼곤...

“무술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당연히 무협지 버금가는 그런 얘기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는 눈망울로...

일반인의 武術에 대한 통념이야 모르는바 아니지만 전통무예의 고수로부터(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나는 手搏이란 武藝는 손으로 벽을 치니 파 묻히고 서까래가 흔들렸다질 않나 왕을 호위하던 어떤자가 우타천벌판이란 곳에 범(호랑이)이 나타나자 달려 가서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질 않나 말 그대로 一打必到, 당적필살이였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 나중에 리허설하며 그 환상이 깨어졌을것에 대한 미안함은 개인적으로 있다. *고려 숙종 7년11월 초하루 임오(壬午)에 왕이 우타천 들판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호랑이가 나타났다. 왕이 시위군사들에게 뒤를 쫒게했는데 견룡부대 교위 송종소가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 왕이 옷을 한벌 하사했다. 고려사, 권11<세가>11, 숙종7년.
 
 

뒤에 강호동씨가 진행하는 “대단한 도전 스타킹!“이란 프로에 출연섭외가 와서 담당작가를 멀리 서울까지 가서 미팅을 한 적이 있는데 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몇일 뒤 부산으로 나를 찾아와서 이것저것 점검하곤 했으나 끝까지 무림절대고수의 면모를 확인하지 못한것에 대한 서운함이 이 분께도 있을런지...

 
[수박이란?]

어릴적 꿈은 가수가 되는것이었다. 가수? 왠 엉뚱한소리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하여튼 가수라는것이 스무 네,댓살 될 때까지 나의 장래희망 일순위였슴은 확실하다.

1990년 3월5일(날자도 잊어 먹지 않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이란 곳을 가 봤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통일호란 기차가 있었는데 누가 훔쳐 갈까봐 양말 안에다 비상금을 꼬깃 꼬깃 접어 넣고 기타하나 둘러메고 게다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한술 더 떠서 立席으로 갔다면 그 당시의 나라는 놈과 上京의 고생등을 두루 짐작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여, 버스타고 한강을 지나가며 “아! 이게 한강이구나”라고 속으로 되뇌였다면 참으로 촌놈의 서울구경에 다름아니었던것이다.

신사동사거리에 방치되다시피 놓여 있던 공중전화에서 어린마음에 동경했던 어느 작곡가에게 전화를 했었다. 이 분 함자를 대면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남진이나 이미자, 패티 김같은 가수들을 키웠다면 더 잘 알 수 있을까? 모른다면 간첩이고 또 키웠다는 말은 그 세계의 언어이니 그냥 토 달지 말고 넘어가자.

우여곡절을 거쳐 서울에 위치한 동국대학교의 후문께에서 하숙을 하며 가수의 꿈을 불태울즈음이다. 한 밤중이나 새벽이었을 것이다. 하늘에 별이 드문드문 떠 있던것이 생각나는걸 보면... 그 집 옥상에서 맛도 모르던 담배를 폼 나게 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각설하고, 이후 짐 싸들고 考試공부란걸 한다고 또 이리저리 돌아다녔었다. 비록, 가수에서 검사로 목표가 바뀌었으나 글자 모양만으로 따진다면 그리 달라진것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나의 안타까운 이십대가 가 버렸다. 

굳이 이런 잡다한 얘길 주저리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의아해 하시는 분도 있으리라... 별로 흥미진진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금년 4월 14일 필자의 사무실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현장실태조사를 나온 적이 있다. 연구관님과 학예사분 그리고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신 경상대학교 모무용학과교수님등... 예기하던 도중에 “수박은 왜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마땅한 답을 하지 못해 한참을 얼버무렸었다.

아마도 이것이겠지? 

“다 ~ 팔자 나름이여!”...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지나고 보니 기회가 아니라 정해진 수순은 아니었나 싶다. 나란 사람은 밥은 굶어도 藝術의 예字는 하고 살아야 할 四柱인듯 하기에... 가정내력도 조금 그러하지않은가? 나의 아버지란 분도 젊은시절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지금은 돌아가신 신상옥감독께서 하시던 ‘신 - 필림’이란 곳에 뻔질나게 드나드셨다질 않나, “최불암도 내 후배야!” 라고 하시질않나(그 분께는 죄송하다) 어찌되었든, 유현목감독님의 ‘순교자’란 영화에 단역목사로 나오는등 몇편의 출연작이 있다하니 전직 영화배우는 맞는것 같다. 이 분의 외삼촌은 1965년 한반도의 반쪽을 눈물바다로 만든 ‘저 하늘에도 슬픔이’란 영화를 기획했던 최현민감독이시다.

다 八字에 있어 이러고 살겠지만(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는다. 읽다 보면 분통이 터져 병원 신세 질 분들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傳統자 들어가는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세 조질 각오정도는 해 두라고 권하고 싶다.

수박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字意부터 밝혀 보는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당연히 手搏이라는 일정한 용어에서 다른것과 구별되어지는 특징적인 동작을 훔쳐 보는 것일테고, 다만 고려나 조선이라는 현장감 넘치던 시대를 직접 경험 해 보지 못한 한계가 있기에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몇몇 글이나 구한말 이후 실제로 그 技藝를 향유했던 분들의 증언과 작위등에 借屍 할 수 밖에 없음을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手에는 손, 재주, 솜씨등의 여러 뜻이 있다고 하나 이 중 ‘손’을 지칭함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搏은 두드리다, 치다, 쥐다이니 아마도 수박은 손으로 두드리거나 치기도하고 쥐기도하는 그런 형태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두드리는걸 어떻게 두드렸는지 치는걸 어떻게 쳤는지 쥐는걸 어떻게 쥐었는지 너무 포괄적이라는것에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수박의 동작을 그 용어만으로 유추 해 내기가 이렇게 쉽지만은 않은것이다. 

고려사의 정중부전(의종 24년(1170) 8월조)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임금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려고 오문 앞에 이르러서(중략) ”장하다, 이 곳이 가히 군사를 훈련할 곳이다“라 하고 오병수박희를 시켰다...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은 무인이지만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여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니 문신 한뢰(韓賴)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쳐서 섬돌 아래로 떨어뜨리자 임금이 군신과 더불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으니 임종식과 이복기도 이소응에게 욕설을 하였다”라는... 수년전에 모방송사에서 성격배우인 이덕화씨를 주연으로하여 방영 하기도 했던 고려 ‘武人時代’의 서막을 올리는 장면인 것이다. 武臣들의 실력행사로 왕은 폐위되고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다 죽여 씨를 남기지 말라”는 命에 의해 한 때 이 땅의 고려라는 곳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시체로 산을 쌓았다고 한다.

이 때의 박은 搏을 쓰고 있다(同指; 충혜왕 3년(1342), 고려사 이의민전, 최충헌전, 태종실록 태종11년(1411)등) 그리고 拍을 쓴 예로는 ‘고려사 열전 권 제 39 변안열전’의 拍戱, 태종실록 태종10년(1410) 1월의 手拍戱(병조와 의흥부에서 수박희로 사람을 시험하여 세 사람을 이긴자로 방패군에 보충하였다), 세종실록 세종3년(1421) 5월의 手拍之戱(...열병을 하고나서, 인하여 수박희를 보고, 술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연주하여 삼군의 장수를 위로하는데...), 세종13년(1431) 3월의 手拍(경회루 북쪽에 나아가 종친들의 활 쏘는것과 力士의 수박을 觀하였다)등을 들 수 있겠다. 우리가 고려사와 왕조실록등으로 확인 할 수 있는것 중 한가지는 手搏이나 手拍, 手搏戱와 手拍戱 그리고 拍戱등이 별 반 다르지 않았으며 매 한가지를 일컫는다는것이다. 즉, 搏과 拍의 혼용이고 병용인것이다. *戱는 수박의 활용을 뜻한다.

그렇다면 拍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拍도 搏처럼 ‘치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는데 단지 그 뿐이라면 이리 긴 말이 무에 필요하겠는가. 拍에는 이 외에도 ‘손뼉치다, 장단 맞추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비록, 그 당시에 어찌들 하고 노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근, 현대까지 기록 된 수박과 관계되는 여러 문헌들과 생존 고로들의 증언등이 현존하여 위의 실록에 등장하는 수박이라는것이 적어도 손뼉을 마주치는 특징적인 태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는것이다. 무형의 문화란것도 유형의 그것들 못지 않게 후대에 흔적을 남기는 일에 그리 인색하기만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작년 10월경 서울시 생활체육협의회 지원으로 열린 모 전통무예대회에서 시연에 앞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여러분 중에 장시가 무슨 뜻인지 아는 분이 계십니까?”라고... 누구도 선뜻 답을 못하였으나 장시란... 세종실록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영등포시장이나 동대문시장과 같은 그러한것을 말한다. 이전 시대에는 市場을 場市라 하고 "저 친구 참 대담하다“가 아니라 ”담대하다“, "나의 명운"등으로 쓰고 읽었는데 그 순서만 바꿔 놓아도 요즘 사람들은 한참이나 혼동을 하니 교육의 힘이란것을 우습게만 볼 것은 아닌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수박은 박수를 예전분들이 부르던 어순이며 옛날 어른들은 박수친다고 하지 않고 "수박친다"라고 했을 뿐이다. 풍물에서 손뼉을 마주치며 하는 것을 박수치기라 하지 않고 "수박치기"라고 하질 않는가? 굿에도 남아있는바 "手拍치기"이지 "拍手치기"가 아닌 것이다. 수박은 拍手 곧, 손뼉치는것을 의미하며, 항간에서 수박치기, 수벽치기라고 하는 일련의 것들과 같은것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임을 확언하는바이다. *'민속용어사전'에는 수박치기(손뼉치기)라 하여 “고려시대의 수박희(手博戱)로 정중부 등의 무신들이 힘을 얻었던 기예가 수박치기이며 필봉풍물굿에 남아 있다. 사물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으면 그 안에서 상쇠와 잡색들이 두 줄로 앉아서 손뼉을 치는 놀이이다”라고 한다. 

전통무예대회에서 시연모습 

 
 
 
 
 
 
 
 
 
 

2004년경 잠시 수박 外의 일로 외도를 한 적이 있다. 태릉선수촌에서 올림픽대표팀을 맡아 트레이너생활을 잠시 했는데 그 즈음 만나 뵌 서울소재 한국체육대학의 모교수님연구실에서 이런 예길 하자 그분께서 자기 손바닥을 마주치는 시늉을 하며 ”이게 수박이라고?“라며 고개를 갸우뚱하신 적이 있다. 일전에는 대학원생 한 명이 수련을 하루만 하고 나오지 않아 이유를 알아보니 “세상에 자기 뺨을 치는 무술이 다? 있다”라고 했다 한다. 옛 것을 시대가 다른 지금의 정서만으로 이해하려 해선 안될것이다. 씨름과 관련하여 이런 글도 남아있다. ”우리 서로 씨름 할 때 서로 뺨 치지 말고 됴히됴히(조용히) 하자"라는... 3백년정도 전엔 씨름하며 뺨도 치고 했나 보다. 쉬이 상상이 되는가? 조선 숙종 3년(1677)에 권대련(權大連), 변섬(邊暹), 박세화(朴世華) 등이 당시의 중국어 학습서인《박통사》를 한글로 풀이한 책에 나온다. 

현재의 중국우슈와 같이 과거의 수박이 徒手武藝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흔히 중국의 예를 들먹이지만 고려와 동시대를 살았던 송(宋; 960 ~ 1278)나라 때의 조로자(調露子)란 사람이 편찬한 <角力記; 역대 솔각(率角) 즉, 각력등에 대한 사화(史話)를 모은 책>를 통해 手搏이란것이 당시 중국에서도 일정한 형틀을 가진 고유명사였슴을 알 수 있는 것이다(북경인민체육출판사, <각력기, 1990>) 나아가 도수박타에서 수박이란 용어가 나왔다란 해괴망측한 說도 이제 없어질 때가 되었지 않나 싶다. 

아래에 관련문헌 몇가지를 인용하지만 추호도 그것의 어슬픈 권위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있지 않다. 일반대다수의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는 전승으로 인한 그리고 실제행위로서의 증명이 현 시대에 더욱 요구되어질 것이기에... 

18세기 말에 백과사전류로 편찬 된 <재물보(才物譜, 이성지 1798년)>라는 책이 있는데 "手博仝今之 슈벽운운..."이라 하여 "手搏을 우리말로 슈벽이라 한다"라고 적시한것이 있다. 자세하게는 "지금의 슈벽은 手搏과 같지는 않지만 마땅히 이 글자를 써야한다"<한국무예의 역사와 특성> 심승구, p281 라고도 한다.

스튜어트 쿨린이라는 코쟁이가 쓴 <한국의 놀이(코리안 게임스; Games of the Orient: Korea, China, Japan 1895년)>를 보면 내용중에 ‘수벽치기’란 것이 있다. 그 상세는 이러하다. "수벽치기(SYOU-PYEK-TCHI-KI: HAND CLAPPING)";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그들 중 한 명이 실수하거나 질 때까지 주어진 순서대로 어떤 손동작을 동시에 취한다. 처음에 각각은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친 다음, 같은 방법으로 가슴을 친다. 그런 다음 손뼉을 치고, 쭉 뻗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친다. 그 다음 손뼉을 치고, 뻗친 오른손을 왼손으로 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손뼉을 치는 동작부터 시작해서 손뼉을 치고 끝나는 마지막 동작을, 두 사람이 처음에 한 대로 세 번 반복한다. 동작이 점점 빨라지면서 놀이는 매우 어려워진다... 

해방 전 국민신보 주필이었던 최영년선생(1859 ~ 1935)은 1921년 <해동죽지>에 수벽타(手癖打)란 漢詩를 쓰신 바 있다. 다행인것은 시에 주석을 단 것인데... *친일 행적은 논제와 무관하다. 

劍術先從手術妙 戚將軍己敎兵才 三節?如差一節 拳鋒一瞥落頭來 검술(劍術)은 먼저 손재주의 묘한 것으로부터 온다. 척장군이 이미 군사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세 절구(節句)에 만일 한 절구라도 어긋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이 머리에 떨어진다. 

九屬有手術古自劍技而來對坐相打兩手去來如有一手失法則便打倒名之曰수벽치기.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는데 예전에 칼 쓰는 기술에서 온 것이다. 마주 앉아서 서로 치는 것인데 두 손이 왔다 갔다 할 때에 만일 한 손이라도 법에 어긋나면 곧 타도(打倒)를 당한다. 이것을 수벽치기라고 한다. *참고로 위의 척장군은 중국의 兵書 중 하나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지은 명나라장수 척계광(戚繼光)으로 보는것이 통설이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살다 간 六堂 최남선선생(1890(고종 27) ~ 1957)의 <조선상식 풍속편, 1948>을 들여다 보자. 선생께서는 “수박과 수벽은 같은것, 본래 武藝의 하나로서 차차 주석(술자리)의 여흥, 아동의 요희(要戱)로 化한것이다. 그 법은 대개 수지(手指)의 굴신과 권악(拳握)의 진퇴로서 일정한 제약에 의한 승부를 결하는것인데... 라고 하셨으며 문화재위원을 지내기도 하신 고 예용해선생께선 “수박희를 우리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젊었을때에 서울의 동대문근처에서 수벽치기를 한다는 노인 몇 분을 만난적이 있다”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이고 대충 이런식으로 하더라 하며 흉내 내시던 것을 현재 문화재관련, 무예계에 종사하시는 몇 분이 증언하고 있다(실명은 생략한다) 지금으로부터 백여년전에 태어나신 권태훈(1900 ~ 1994 졸)옹께선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 中 p377 ~ 378에서 "수박이란 손을 사용하여 상대방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타격을 방어하기 위해 연습하는 방법이다. 손은 주먹을 쥐는것이 아니라 편 상태로 상대편 손쪽으로 재빨리 뻗으며 상대방 역시 최대한 빨리 손을 내밀어 부딪히는식으로 훈련한다. 흔히 곡조를 띤 소리를 질러가며 박수도 쳐 가며 행한다. 점혈법의 급소타에 대비한 훈련이다. 두사람이 서로 손바닥을 부딪혀가며 노는 놀이의 한 형태로서 민간에 전해 내려온다"라는 귀한 말씀을 남기시기도 했다.

수벽의 사전적 定意는 이러하다. ①손바닥 ②두 사람이 서로 보고 앉아 손바닥을 마주치는 장난.

구차하게 더 이상의 예를 들지 않아도 고대 軍士무예였던 手搏(拍)은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과 내가 어릴 때 하고들 놀았던 손뼉치기란것과 脈을 같이하며 수박(박수), 수벽, 수벽치기(수박치기, 손뼉치기)등이 동의어임을 또한 알 수 있는것이다(不定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니란 것을 증명 해 주기 바란다) 설령,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장풍을 쏘아대진 못할망정 동네에서 코를 ‘찔찔’흘려가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바닥이나 치던 그런것이 우리네 무술의 本家라고 일컬어지는 手搏이라니 그 실망스러움이야 짐작이 가고도 남는바이나 어쩌겠는가? 그게 그것인것을... 

手搏을 하면 곤장이 백대?

“搏戱로써 돈과 물건을 내기한자는 각각 장1백 이며, 그들을 유숙시킨자, 돈을 대고 도박을 시킨자도 또한 장1백 이며, 음식을 걸고 활쏘기를 익히는 무예자는 비록 돈과 물건을 걸었다해도 죄가 없다. 고려사, 권85, 刑法志. 2 禁令. 

고려 때 法으로 嚴禁(곤장 백대는 쳐 죽이겠다는 말과 같다)했던 手搏이 설마 요즘처럼 손바닥이나 치고 노는 유습에 한하였을까? 아니다. 잘 만하면 벼슬길도 열리는 뭐 그런 武人의 특기였으며 그 위력적인것 또한, 正史가 말해 주고 있다. *그 당시 이의민(? ~ 1196, 명종 26)이란 자가 있었다 한다. 아버지 이선은 소금장수 였고 모친은 옥령사(玉靈寺)란 절의 여종이었다고 하며 8척 장신에 타고 난 기골은 장대하여 두 형과 함께 시골 구석(지금의 경주)을 횡행하며 흉폭한 짓을 일삼는 파락호였던지라 이들의 악행을 알게 된 안찰사(按察使) 김자양이 어느날 잡아다가 족쳤는데 형들은 매질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 자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어찌 김자양이 경군(京軍)으로 추천 해 촌구석에서 - 왕이 있던 개경으로 마누라와 애들을 데리고 끙끙대며 올라가서 ‘업치락 뒤치락’ 한 뒤 경대승 이후의 고려정권을 장악하여 설쳐 대다 최충헌형제에게 죽임을 당하는 파노라마를 연출했던 이이다. ‘고려사 叛逆 제 사십일 이의민전 ”義旼善手搏毅宗愛之운운“ 이의민이 수박을 잘 하였다. 의종이 아껴서 대정(정9품 현재로 치자면 소위정도)으로 삼았다가 별장(정6품 소령)으로 승진시켰다. 人德이 없기로는 의종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총애하던 이의민이란 수하에게 훗날 등뼈가 꺽이며 죽고 그 시체는 경주 곤원사(坤元寺) 연못에 던져지게 되니... 조선에서는 수박이 법률로 武科試取의 과목이 되기도 한다. 세종실록 세종25년(1443) 11월 ”... 삼가 <<육전>>을 상고하건데 이르기를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 능히 삼백보를 달리는 자가 상등이고, 이백보를 달리는 자가 중등이며, 또 수박의 기능이 능히 네사람을 이기는자가 상등이고 세사람을 이기는자가 중등이 된다‘하였으나... “(조선 최초의 법전이었던 '육전(六典:경제육전)'에 실린 임금의 호위무사인 보갑사(步甲士) 선발 규정 中) 고려 刑法志에 현상금을 걸고 搏鬪할 때의 기술이 수박이었다 하고 조선 세조 3년에는 담양의 향리와 官奴(노비들)등이 나라에서 수박으로써 시재한다는 말을 듣고는 다투어 서로 모여서 수박희를 하면서 몰래 용사들을 뽑았다. 충청도 진천현 굴암사의 중 성경등이 官에 고하기를 중 처의, 요여가 상혜와 더불어 수박희를 하다가 도끼, 낫으로 상혜를 죽였는데...”(세조 10년)라는등 수박은 고려와 조선에서 기층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그로 인한 폐해 또한 적지 않았으나 어디 그 뿐이랴, 몽고의 침략이나 壬亂등에서의 憂國, 浩然之氣도 있었으리라...

언젠가 모 TV프로에서 남녀아나운서가 쎄쎄쎄는 일본말이기에 우리말로 바꿔 불러야 한다며 손을 마주잡고 아래 위로 흔들며 ‘손, 잡, 고’라고 하는것을 본 적이 있다. 왜 쎄쎄쎄가 일본말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으면 손을 마주대다라는 뜻으로 쎗스루란 것이 있으니 그런것 아니냐?라고 되묻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근거 없는 가정을 한번 해 보자. 혹시 ‘시노이자’, ‘시시노자’가 무슨 뜻인지 아는 분이 계실까? 일본말처럼 들리지만 아니다. 놀이를 시작할 때 박자를 맞추기 위해 "시작 놀자“가 그렇게 化 한 것이다. 쎄쎄쎄도 틀려서 새로 하니까 ‘새로, 새로, 새로’, ‘새, 새, 새’가 된소리로 되었거나 또는 중국에서 유래하는것이라면 고맙다는 ’쎄쎄‘일 수도 있다는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으며 어찌되었든 좋다. 쎄쎄쎄란 말이 일본말이라고 해도 그것에 맞춰서 하는 그 동작까지 그네들의 것이라고 할 순 없을테니까... 

1900년대 조선의 사회, 풍속을 찍은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서문당)에 아이들이 수박을 치는 사진이 실려 있다. 두 여자아이가 재미있게 손뼉을 마주치고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것으로 봐서 필시 무슨 노래라도 곁들인 듯 하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이전의 사진인것으로 미루어 특히, 식민지시절에 일본아이들의 놀이가 이 땅에 전해졌고 놀이 이름도 쎄쎄쎄라고 한다는 얼치기 주장은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것이다. 이 놀이의 본디 이름은 手搏戱이며 搏 대신 拍을 쓰도 무방하다는것은 위에서 볼 만큼 보고 온 상태이지 않은가? 하물며 놀이 자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가 흔히 "쎄쎄쎄"라고 하는것에 맞춰서 하는 동작도 1924년 윤극영(尹克榮)선생께서 작사·작곡한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인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라는 "반달"에 맞춰서 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단임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것이다. 

나선김에 수박희(손뼉치기놀이)를 하며 불렀던 노래 몇 가지를 부언하고자 한다. 덧 붙여 그것의 武術적인 흔적은 놀이의 벌칙으로 하였던 ‘상대의 뒷 목을 끌어 잡고 팔꿈치로 어깨죽지를 찍는다던지 엎드린 상대의 등을 양손바닥으로 두드린다던지 세게 치면 벙어리가된다는 穴인 아문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그걸 찾는다던지...하는것들에서 덤으로 확인 해 볼 수도 있다. 

손뼉치기가 아이들 놀이라고?... “애들이 亞門혈을 알어?” 

전 문화재위원이셨던 중앙대학교무용학과의 정병호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다 (수년전 서울 장충동의 국립극장에서 모무용가의 공연시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귀찮게 해 드리는등 나로 인하여 알게 모르게 속을 끓이신 분 중의 한분이시다. 그리고 2007년 2월 수박과 수박춤을 문화재청에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국가지정무형문화재지정신청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할 때는 흔쾌히 추천을 해 주시기도 한 고마운 분이기도 하다) 

"수박치기를 요즘은 아이들 놀이라고하는데 원래 그런 것은 아니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필봉굿에서도 수박치기를 하는데 아이들놀이를 왜 어른들이 하겠느냐, 그것도 굿을 하며... 어른들이 교육적인 목적으로 가르쳤든지 아이들이 옆에서 보고 흉내를 냈다고 보는 것이 옳다“라고 말이다. 우연히 얻어 읽은 선조 33년 4월에 ”비망기(備忘記)로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권법(拳法)은 용맹을 익히는 무예이니 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배우게 한다면 동네 아이들이 서로 본받아 연습하여 놀이로 삼을 터이니, 뒷날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기록도 있는 바...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각 도지사에게 조회하여 전국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향토오락을 조사, 정리한 <조선의 향토오락(朝鮮總督府 調査資料), 村山智順撰, 朝鮮總督府,昭和16年(1941), 무라야마 지준>을 보면 충청북도 음성지방에서는 겨울에 일반인들이 마주앉아 손바닥을 치며 놀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에서도 쎄쎄쎄에 17세기 성인들이 즐겨하던 ‘오테아와세’란 동작이 들어가 있다고들 한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쎄쎄쎄란 말 자체는 일본것인 듯 하다. 

더구나, 1895년 코리안게임스의 ‘수벽치기’ 등에 가슴을 치는 제 동작의 존재로 인하여 그동안 ”여자아이들의 명랑한 놀이 운운“ 하던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엉터리 발언이었는지도 알 수 있는것이다. 女兒들의 놀이였다면 가슴을 치는 동작은 포함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쯤 와서 같은 風俗과 歷史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손뼉치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심양에서 만났던 평양출신 김정옥씨의 예기를 잠시 들어보자. “북조선에서는 수박치기를 수박놀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武官들이 하던 것이라고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선생님(박미란, 45~6세)한테서 배웠습니다”... 평양출신으로 평양진흥중학교, 평양요리전문학교(학사과정)를 나와 심양에 온지 9개월정도 되며 2~3년 더 있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는데 수박치기가 우리말이니 수박은 박수를 말한다등... 한국에서는 수박치기(손뼉치기)를 쎄쎄쎄라고 하며 일본에서 건너 온 아이들의 놀이라고 한다는 말에 북조선에선 수박치기를 민속놀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민속이란 말을 쓰지는 않을것이라는등 참으로 "똑"소리 나는 아가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혹시 언니 없어요?”라는 짓궂은 질문에 해 맑게 웃던... *북한민속관련 책들을 보면 ‘수박치기’라 명기하고 主體를 아이들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전부는 아닌것이다. 

아래는 1930년경의 조선에서 수벽(박)치기에 맞춰 불렀던 노래이다. 

"기러기야 기러기야 어디로 가니

한강까지 간다.

무엇하러 가니

새끼 키우러 간다.

몇마리 키웠니

두마리 키웠다.

너 한마리 갖고 나 한마리 갖자

너의 집은 어디니

작은 시내 넘고 큰 강을 건너서 계수나무 있는 곳

할머니는 물 길으러 복동이는 절구 찧으러

옥순이는 밥하러 부뚜막 앞에 어머니는 꽃구경 가고

아버지는 물놀이 가고(하략)... <조선의 향토오락(村山智順, 1941)>

<수박치기 - 수박치기의 수박은 곧 손벽을 의미한다>

손을 율동적으로 놀리면서 음률에 맞추어 손벽을 친다.

쿵딱 쿵딱 쿵딱쿵 딱딱

12 12 121 22

땅딱 땅딱 쿵딱쿵 딱딱

31 31 313 22(황해도 지방). 

1은 자기 무릎치기, 2는 자기 손벽치기, 3은 상대편 손벽치기.

<전렴>둥그다 당딱 둥그다 당딱

1)에라 ~ 좋다 <후렴> 둥그닥 당딱 둥그닥 당딱 둥그닥 당딱

2)이팔 ~ 쳐라 <후렴>

3)저팔 ~ 쳐라 <후렴>

4.가슴 ~ 쳐라 <후렴>

5)바닥 ~ 쳐라 <후렴> (전라도 지방) <조선의 민속놀이(북한민속원, 1964)> 

이것 말고도 구전되고 있는 것이 더러 있다. *1896년 미국거주 한국인노동자(안정식(전라도사람으로 추정, 이해철 외 총 3명)들이 녹음 한 음반에 수박치기가 수록되어있다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찾아 볼 일이다. 출처; 국악음반박물관 

일제 강점기이전의 朝鮮에 손뼉치는 戱와 그 노래 그리고 先在했던 武적, 舞적인 기예들이 꿋꿋이 이어지고 있었슴을 섣불리 부정하여 피의 선조들을 욕되게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수박이란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와 발해를 본류로 하여 그 유민들이 전승, 향유 해 내려오는 북방문화로서 기나긴 역사성과 전통성, 학술성 그리고 향토적 특색을 인정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순수한 전통기예, 몸짓문화이며 그 源 모습을 잃지 않고 이 시대에 전해 진 소중한 표현 양식으로서 다분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성에 기반한 소중한 우리네 문화유산인것이다. 

  
김학현선생님 댁, 선생님과 사모님, 장백문화관 유희춘과장 외 

打拳; 수박을 打拳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들춰보고자 한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선조께 아뢰는 내용중에 "신이 그가 거느리고 있는 각 처의 묘족과 만족에 대한 명칭과 사용하는 기예에 대하여 묻자, 총병은 곧 섬라(暹羅)와 도만(都蠻)등 여러 번방에서 귀화한 병사들을 좌우에 세워 놓고 각기 자신의 무기를 잡고 차례로 나와 묘기를 보이게 했는데(중략) 타권(打拳), 천봉전, 양가창등의 명칭을 가진 것들이 있었고, 사릉편과 칠십근무게의 언월도 및 수전등의 무기는 총병이 직접 사용하는 것이였습니다. 종일토록 구경하고 나서..." <선조실록> 21집, 685면 "유격이 타권의 기법을 앞에서 보여줬는데, 그 법은 뛰면서 몸을 날려 두손으로 자기 얼굴이나 목, 혹은 등을 치며, 가슴과 배를 번갈아치기도 하고 볼기와 허벅지를 문지르기도 하는데 손을 쓰는것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한지 사람이 감히 그 앞에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조실록> 권99, 31년 4월 경신. 

손뼉치기인 수박과 타권인 수박(아래에서 인용하는 용당소품(涌幢小品), 병기편 참고)이 다른것일까? 수박치기는 제 손바닥으로 자기 몸을 이리저리 치며 단련하는것이 기본이며(상대와 게가 걷듯 걸음질하며 손뼉이나 어깨등을 마주치기도 한다) 여기에 장단과 몸짓이 들어가게 되면 수박춤이란 특기 할 만한 무용이 되는데 위의 것과 너무도 흡사 해 보인다. 都蠻은 우리가 오랑캐라 일컫던 여진족을 말하고 그들이 살던 함경도는 택리지 <<八道總論>>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오래전부터 공유 해 왔던 技였지 않나 싶다. 조선초기 귀화한 여진족의 후예들이 잔류민으로 함경북도 부령군등 6진이 설치되었던 산간에 숨어 있을 때 비롯되었다는 在家僧風習에 대해 단재께선 “...함경북도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 선배(武士집단을 말한다)의 유종(遺種)이니...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신 바도 있다 <조선상고사> *그들의 민속놀이에는 주지춤, 수박치기, 길마지기, 벙어리놀음(걸립굿의 일종), 윷놀이, 그네뛰기, 장기등이 있었다고 한다. 

"명 천계(天啓) 원년(元年, 1621)에 주국정(朱國禎)이 편찬한《용당소품(涌幢小品)》,권12 <병기편(兵器篇)>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타(白打)는 곧 수박으로 겨루는 것이다. 당나라 장종(莊宗)은 수박으로 내기를 하였으며, 장경아(張敬兒)는 수박으로 공을 세웠다. 세속에서는 타권(打拳)이라고도 하며, 소주인이 말하길 사람의 뼈를 부러 뜨려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빨리 죽이고 천천히 죽이는 것은 오로지 수법(手法)에 달려 있다...” . 수박과 백타를 동일시하고 맨손무예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들이라는 設이 있으나 적어도 위의 타권인 수박은 고유명사인 것이며(내용중에 특징적인 기술체계가 있다) 선조실록(同 시대)에 등장하는 打拳과 연장선에서 이해 할 필요가 있다. 백타가 태권도경기라면 수박은 태권도를 말한다. 태권도경기와 태권도를 어떻게 같다 할 수 있겠는가?
 
 
 

脚戱; 말이란 원래 와전되는 것이다. 1798년의 <재물보>에 ‘탁견’이란 것이 나오는데 武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였다((조선 영조때 사람들은 씨름을 武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수익이다) 당시, 탁견이 보통명사였다는 것은 같은 책에 실린 ’시박‘을 통해 부정 할 수 없게 된다. 씨름의 일종인 시박(서로 치는것)도 亦(~ 도 또한) 탁견이라 했으니...자세하게는 탁견이란 씨름처럼 붙잡고 하는것이 아니라 떨어져서 搏擊하는것을 일렀었다. 넘어뜨리는것은 부차적인것이다) 수박은 자고로 손바닥으로 치는 卞이었다. 지금의 택견은 ‘발길로 맞은 편 사람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유희. 脚戱(1938, 昭和13 조선어사전)란 것이었고 (동지; 조선총독부 조선어사전(1920) 택견, 脚戱 이희승, 국어대사전(1961) 태껸, 각희 ’태견하기‘ 코리안게임스(1895) kicking, 해동죽지 ’탁견희‘(1921)... “옛 풍속에 각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차서 넘어뜨린다. 최하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운운”등) 비록 탁견이란 말이 후에 각희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였다 해도(이건 당연하다. 각희도 武의 일종이니, 필자는 武를 손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는등의 技로 이해하고 있다. 행여 무술이니 무예니하는것들의 개념정리를 요구하지 말았으면 한다) 곧 武인 탁견이 될 수 없슴은 자명하지 않은가? 지금의 각희인 택견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통성과 특이성등을 두루 갖춘 문화유산이나 그릇 된 주장과 아집으로 본질이 호도될까 두려운것이다. *서로 뜻이 맞지 아니하여 이러니저러니 시비를 따지며 가리는 모양을 우리네 말로 '티격태격'한다라고 하며 이의 상위어는 '티격'이며 '싸우는 모양세'를 일컫는다. 수년전 북경대 김자연박사님을 통해 ’아침이슬‘을 부른 김민기선생의 무대에 수박을 소개하려 했으나 태권도에서 알면 난리 난다? 라며 거절당한 적이 있다(기존의 제도권 내 대다수는 '메이드 인 제팬'을 기본으로 한다. 택견은 위로써 알 수 있듯이 각희인 체기였고 검도는 일제강점기에 그들이 우리에게 이식한 식민지문화였슴을 아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을것이다) 2003년에는 조선일보에서 수박 특집을 싣기로 했으나 담당기자의 선배라는 사람이 “택견에서 알면 난리 난다?라고 하여 활자화 되지 못한 일도 있다. 타권이 탁견으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니 견강부회가 될 뿐이다. 참고; 무도미디어, ”우리 조상은 격투기를 통해 선린과 우호를 두터이 하여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송준호 대담기사. 

수박, 타권, 탁견, 각희(인 택견) 에 대해 궁구 해 보았다. 이 외에 구한말까지 전승되어 오던 體技로는 상대방의 무릎을 밟고 뛰어 올라 뒷목을 걷어 차는 개성의 제비치기, 물구나무를 서며 양 발로 차는 격도(목을 차면 목이 부러지고 허리를 차면 허리가 부러지는등, 황소를 세워 놓고 차게 되면 이 또한 능히 죽일 수 있었다 한다) 평안도의 날파람(수박에 가까워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박치기도 하는 그런것이었다 한다. 1964년, 북한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민속학연구실<조선의 민속놀이> 중. 실존인물로 고당 조만식선생이 계셨다. 숭실학교 입학전까지 날파람터의 솔개였고 大將짓을 하셨다고 한다) 박치기(김일선생께서 생존하실 때 서울의 을지병원을 방문하여 들은 얘기이다. 역도산선생이 “너는 조선놈이니 박치기를 해라”하며 가르치셨다고 하는데 역도산(김신락)선생의 고향은 함경남도 흥원이다. 평양박치기란 것은 유명했었다. 떼밀기(밀어서 넘어뜨리는 것이다), 경북군위군의 軍士훈련이었던 박시(재물보상의 ‘시박’으로 여겨진다. 1941년, 무라야마지준의 글에도 언급되고 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서로 어깨로 밀어 붙여 陳을 뚫는 것이다. 나중에 동네 왈패들이 신작로에 모여 난장박시라 하는 패싸움을 했었다)등이 있었다. 

수박의 주변, 유사문화로는 ‘살판의 발바닥치기’, ‘軍物(농악)의 수박치기’, ‘진도 강강술래 중의 손치기’, ‘북한의 발춤(지난날 함경도 단천지방에서 武士들이 싸움터에 나갈 때와 이기고 돌아 올 때 추던 것이라고 한다), ’개성지역의 박판춤(투박하게 내리 누르며 비비는 발 동작, 두팔을 벌리고 어깨를 크게 놀리는 어깨춤 동작, 가슴과 어깨를 치는 동작등이 특징적이라고 한다)‘등이 남아 있다. 

[수박의 계보]

民間傳承 되어 온 技藝들이 의레히 그러하듯 수박과 수박춤의 경우도 계보와 관련한 문헌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 고종이후의 실제 행위자로서 그 전승의 맥락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기적인 구분} 1800년대; 김달순, 1900년 이전과 초; 천일룡, 김학천, 민완식, 김만석 1920 ~ 40년경; 송창렬, 김학현, 오진환, 김룡칠 1973 ~ 2008; 송준호 

 
백범과 함께, 반공투사 중산 민완식선생
 
 
 
 
 
 
 
 
 
 


{지역적인 구분} 개성(松都)지역 민완식((1911 ~ 47) 경기도 개성거주) - 오진환((1919 ~ 2002년 졸) 경기도 개성 - 서울거주), 천일룡((? ~ 1950) 개성 남문통 거주) - 송창렬((1932 ~ ) 함경도 북청 - 경기도 개성 오정문 - 경남 김해거주) *개성은 근대까지 手搏의 마지막 맥을 이은 곳 중 하나이다. "송도(고려수도 개경)의 手拍이 곧 선배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支那)에 들어가서 拳法이 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함남 단천지역 김달순((1886 ~ 1962) 중국 장백현 십사도구 간구자로 이주) - 학천 - 학현, *김룡칠선생님의 경우 先代에 함경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셨고 김만석선생의 고향도 함경도라고 하시나 정확한 연세를 알지 못하고 계시다. 평안도(자강도)지역의 手拍舞, 전남 필봉굿(중요문화재), 경북 빛내농악(도지정문화재)등, 이외에 진도지역에도 약간의 기능을 가진 분이 생존하고 있으며 공공연하게는 경남 김해에 거주하시는 송창렬선생님(국민생활체육 서울시전통무예연합회 고문, 서울시 생체협 회장 표창, 2004년 제2회 武道大賞 수상, 2005년 국회문광위위원 공로패수상, 2007년 문화재청에 수박(무예부문) 지정신청등)과 중국 길림성장백현 거주의 김학현선생님(사단법인 대한수박협회 고문, 1990년 전 중국조선족문예콩쿠르 특별상 수상등, 2003년 동아일보기사 개제등) 두 분이 알려 져 있다. 
서울에 사시던 오진환할아버지(6, 25(1950년)전 개성역에 근무하셨는데 驛舍 뒤에 위치한 ‘개성철도공원’이란 곳에서 대한체육회회장을 지내기도 하신 고 민관식선생의 兄, 중산 민완식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셨다고 한다)께서는 2002년 돌아가셨다. 
제1회 국민생활체육 서울시전통무예대회(2002년 12월 8일, 서울 금천구)에서 송창렬선생님의 기예가 예전에 민완식선생으로부터 배운것과 동일한 것이다라는 증언을 마지막으로 남기셨는데 2003년 중국에서 김학현선생님을 초청하여 개최 한 ‘이북오도청 세미나’에 함께 모실 수 없었던 것이 아직까지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위의 진도는 광주의 오기이다. 

“비운의 왕비였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완식선생으로부터 수박의 일단을 받으셨던 고 오진환선생과 일제 강점기 개성(송도)에서 부친이 운영하던 공장의 십장이었던 천일룡선생으로부터 수박의 전모를 전수 받으신 송창렬선생님, 수대에 걸쳐 집안 나락으로 수박춤등을 이어 받은 김학현선생 이들 세 분 어르신들과 중국 연변작가협회 김룡칠선생등으로부터 송준호씨(수박보존회, 사단법인 대한수박협회 회장)가 유일하게 전수 받아 그의 직전 제자들과 함께 수박 그리고 수박춤의 문화재지정과 보급에 나서고 있다(2006년, 서울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수박시연 자료 中)

 
북한의 손뼉춤

 
 
 
 
 
 
 
 
 
 

북한의 경우는 수박의 여러 갈래 중 수박춤과 수박놀이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를 전승지역으로하는 수박춤은 북한의 공훈예술가인 전한률선생(1931 ~ )께서 발굴하셨다고 하는데 선생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하여 1955 ~ 56년 사이에 서북부지방의 민속무용인 손벽춤(일명 수박춤)을 발굴하여 무대에 올림으로서 1956년 8월 전국전문예술단체 축전에서 특등상을 받고 모스크바에서 진행 된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는 은메달을 받기도 했다 한다. “수박춤은 서북부지방 사람들의 락천적인 민속전통을 훌륭히 구현하고 작품구성이 원만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절주있게 치는 손벽소리는 흥을 더욱 돋우어 준다” 출처; <조선향토대백과> 

*날파람의 맥은 끊긴 듯 보이나 1960년 초 개성에서 계정희라는 민속학자가 찾아 낸 ‘택견’이라는 것이 혹, 그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수박의 구성]

수박에는 武藝적인 搏擊뿐 아니라 舞踊으로서의 수박춤과 遊戱적인 수박치기가 존재한다.

劍術이 劍舞가 되고 나무 칼 만들어 유희적으로 하듯 수박에서도 같은 맥락을 가지고 傳承 되어 왔슴을 알 수 있는것이다. 즉, 수박의 동작들을 借用하여 여러 무용적인 몸짓과 장단에 어우러지게끔 한 것이 공연문화로서의 수박춤이었다고 한다면 항간의 손뼉치기는 그것의 殘存유습인 것이다(수박의 기본틀인 제몸치기(원래 용어는 아님, 자기 손바닥으로 제 이마나 뺨, 어깨등을 치며 단련하고 힘을 과시하는 것)에 몸짓등을 첨가하게 될 때 수박춤이란 무용이 되고 앉거나 서서 “이마 치고, 뺨 치고...”등의 입장단을 곁들이거나 상대방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유희적으로 하게 되면 수박치기가 된다)

이러한 수박 - 수박춤 - 수박치기의 연계성(轉移)에 이유해서 일 동작이 행위자의 개인적인 특성과 목적에 의해 보다 무술적으로 또는 무용이나 유희적으로 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즉, 목적성에 따른 일 동작의 활용인 것이다) 逆으로 그에 대한 구분과 평가의 기준이되기도 하는 것이다. *수박과 수박치기는 동의어이나 武와 戱의 구별을 위해 따로 쓴 것이며 손뼉치기(수박치기)는 제몸치기의 동작들을 상대방과 마주하고 서로 하는 상대몸치기의 응용임을 유의하시기 바란다(손뼉을 치는것이나 상대의 어깨등을 치는것이 무에 다를까? 고정관념을 버려야 올 곧게 이해 할 수 있다) 

수박춤을 따로이 공연문화라 함은 그것에 일정한 스토리가 존재하고 특별한 양식으로서의 복장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여타 민간기예의 경우 대부분 평상시 입고 있던 옷이 곧, 무대복이었던 것에 비해 수박춤의 경우는 위의 요소들로 인해 전문연희의 흔적마저 보여지는 것이다. 만주에서 난다는 울로초로 모자와 치마를 새끼꼬듯 해서 입고 나체로 춤을 추며 장단은 동살풀이(북청사자놀음전수조교 동선본선생 고증) 한가지이나 북한 평안도의 것은 <조선의 민속전통, 제7권>에서 알 수 있듯 ‘휘모리, 느린 타령장단등’ 몇몇이 더 보인다(자강도의 수박춤은 수시로 추어졌고 철산의 손벽춤은 남한의 여산군 수박희처럼 7월 백중에 세시풍속으로 하였다고 한다. < 동국 여지승람>, 권 34, 여산군 山川條 - "여산군에서 해마다 7월 15일에 가까운 양도 (전라, 충청)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수박희로 승부를 다투는 풍속이 있었다") 

김룡칠선생님의 증언으로는 1940년경 설 명절에 연희되기도 했다 한다. 

“수박춤은 옛날부터 우리 인민들이 수박희라는 무술을 연마하는 과정에 창조되고 추어 온 민속무용이다... 

수박춤은 수박희의 주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손으로 가슴치기, 팔굽으로 몸 부위치기, 땅치기, 상대의 어깨치기"등과 무사들의 위풍있는 걸음걸이와 몸짓들이 기본으로 되어있다. 수박희의 기본동작들이 율동화되어 있는 이 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던만큼 우리나라의 여러지방들에서 추어지게 되었다. 오늘까지 전하여 오는 李朝시기의 수박춤은 평안도 랑림지방(오늘의 자강도)에 퍼져있던 민속무용이다<조선의 민속전통, 제7권>”. 공연등에서 시연되는 북한의 수박춤은 무대용으로 개작 된 것이다. 씨름춤(무용조곡 ’계절의 노래‘참고)이나 검무, 무사춤등 창작활동에 그 동작을 일부 응용하고 있으며 북한어로는 손벽희, 손벽춤이라고도 한다. 수박춤의 원형질에서 볼 수 있는 장단과 奇怪하기까지 한 여러 표정들 그리고 神氣등으로 미루어 살풀이와의 관계 또한 주목해야하지 않나 싶다(“... 원래 굿판에서 추던 살풀이 춤은 잡귀나 잡신을 몰아내기 위한것이 아니라 무섭고 거친 전투적인 춤이었다고 한다”<한국미 그 자유분방함의 미학>, 최준식)

송창렬선생님관련; 수벽(手搏)의 시대적 가치(미국 아틀란타대학 체육학박사 범기철, 2002년); 

“... 개성(송도)에서 일본침략시대에 수벽을 목격한 오진환씨(개성시 남산동 출신)가 현재 서울에 살고 있어 수벽에 대한 중요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것은 수벽의 전통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가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김해에 거주하고 있는 수벽의 명인 송창렬옹은 수벽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데 송옹의 수벽은 택견의 동작과는 현저히 다르다... 문자 그데로 무용총벽화에서 엿 볼 수 있는 수벽의 의식적 원형과도 그 맥을 함께하고 있다.

충북 진천군 발행, 國武論叢 제2호 ‘수박론(手搏論)’ - 수박 기능보유자 발굴에 즈음하여 김재일(배달국무연구원장, 전)대한검도회부회장, 검도8단 범사); 

“... 최근 발굴한 송도수박은 내용적으로는 ‘바라춤과 무당춤’같은 것이 섞여 있고 때로는 태극권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하고 마치 군무, 무도와 무술, 무예가 미분화 된 하나의 종합적인 원형이라는것을 발견하고 마치 원시무술의 원형을 보는 듯 하여 매우 놀랐고 이 연구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무술도 발전을 거듭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마치 무당의 춤과 같이 황홀하면서 신들림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 경지는 무예, 즉 예술의 경지로 승화하여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 본 연구의 동기가 된 송도수박 기능보유자의 시연은 바로 이런 부분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김학현선생님관련; 1995년 서울신문 기사이다. "민족혼 담긴 [함경도 수박춤] 사라질판, 예인 김학천옹 와병, 생활고로 은둔 생활" 

...와병 중이라는 민간예인은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김학천(64) 노인이었다. 그는 장백현문화관장을 지낸 동생 김학현(60) 선생과 함께 지난 1990년 요령성 단동에서 열린 전국 소수민족문예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분이다.그 때의 수상작품은 수박춤이었다.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심사위원들이 며칠 계속된 콩쿠르에 지쳐 꾸벅꾸벅 졸다 수박춤을 구경하던 관객들의 박수에 놀라깨어 침을 흘리면서 춤에 도취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김학천·학현 형제는 울로초를 가지고 미니스커트 모양으로 짧게 엮은 치마만을 팬티위에 걸치고 무대에 올랐다.수박춤에는 이렇다 할 악기반주가 없다. 다만 주연격인 형이 발가벗은 사지를 이리저리 치면서 입으로 갖가지 소리를 냈다.그 소리는 바람,우레,비,짐승,새 소리등 무궁무진했다.동생은 함지박 물에 엎어 놓은 바가지를 두들겨 형의 손바닥 장단을 따라 맞추었다.흥이 한껏 돋아나면 형이 여러 형태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그리고 형제가 서로 상대방의 몸을 손바닥으로 쳤다...“ 참고; <중국 조선민족무용사>, 최봉석<중국 조선족무용 발전 맥락에 대한 고찰> 이애순, 문학과 예술, 1992년 5기등. *기사 중 '소수민족콩쿠르'는 조선족의 오기이다. 

시간적인 발생순서를 무술 - 무용 - 유희로 인정 할 때 아마도 상대몸치기에서 제몸치기(수박춤은 제몸치기에서 상대몸치기로 변하며 獨舞, 對舞, 群舞로 나뉘어진다)와 손뼉치기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수박의 특징]

手搏은 壯士들의 몸짓이었다. 그 특징은 근접한 거리에서 뚜렷이 드러 날 수 밖에 없는 바 수련시 자기 손바닥이나 팔뚝등으로 제 이마 ~ 옆구리, 허벅등을 기본적으로 쳐서 단련하고 맷집을 기르는것이 우선시 된다. 상대방과 어깨나 팔뚝등을 부여잡고 힘을 겨루는 흡사 "소싸움"을 하듯 하는 ‘용쓰기’란 것이 존재하며 이에 여러 기술들이 접해지게 되는것이다. 肩胛을 돌려 등근육을 사용한다든지 反動을 활용하여 타격력을 증대시키고자하는 法들이 있으며 발질시 상대를 끌어대며 허벅을 차는것등은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때는 용쓰기가 전제된다. 기술을 쉽게 외우는 방법으로 전해져 오는 "잡(잡고 치기), 놈(누르고 치기), 지(대고 치기), 랄(돌려서 치기), 떨(털어내고 치기), 지, 마"라는 頭문자는 조선말까지 전승되어 오던 민간의 "수투불림"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료 상에 수박을 수행하는 무인들이 '勇力' 혹은 '旅力 絶人'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기초체력에 있어서 다른 일반인들보다 강했고 수박을 수행하는데,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갑사들이 하는 수박은 여러 정황과 비교하여 볼 때, 근지구력과 근력과 같은 체력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둔탁한 움직임의 수박 시행이 이루어 졌으리라 생각된다(한국체육학회 2005년도 15권, 육군사관학교 남덕현교수의 "麗朝時代의 갑사에 관한 연구" 中)



[나오며]

중국 조선족만이 갖고 있는 비물질 문화유산을 보호하는것은 아주 필요한것이다. 비물질인 구연종목 즉 만담, 삼로인 그리고 탈춤, 수박춤등 무형문화재를 계속 보존 계승, 발전시키려면 정부차원에서 전문기구를 설치하고 전문인원을 배치해야 한다. 당연 금선무는 보존하는것이고 계승, 발전시키는것은 차후의 일이다. 언젠가 장백조선족자치현에 갔을 때 수박춤을 보았는데 수박춤이 연변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중국 공산당뉴스) *중국에서 학무(鶴舞)가 국가급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길림신문; 조선족무용 <<학무>>,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으로 2008-04-16 참고. 2007년 선생님을 뵈러 가니 중국문화국(우리의 문화재청에 상당하는)에서 사람들이 나와 등기를 받아갔다고 하셨다. “수박춤도 문화재로 지정하려하는데 누가 하고 있느냐”라고 물어, “셋째형도 죽고 나도 나이들고 아프고 해서 하지않는다”라고 하자 “그럼, 무덤이라도 같이 가 보자”는등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수박과 수박춤을 武藝와 舞踊部門으로 하여 한국의 문화재청에 그동안 정리한 자료를 제출하고 문화재지정신청을 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9월께 조사보고서가 작성되어 進達된다고 한다. 

비록, 지정받지 못한다 해도 그 품고 있는 가치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월북무용가인 고 최승희선생은 언젠가 “죽을 힘을 다 했다!”고 하셨다. 나는 그러한가?... 

“전통이라는것은 그 시대 민증들에게 보편성과 생명력을 갖고 있어 전래되기도 하고 또, 역사의 우여곡절안에서 명멸되기도 하지만 후세에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다시 복원, 계승된다”... 釋迦의 말씀이라고 한다. 

다 팔자 나름인 것이다.

출처 : 한국문화예술인총연맹
글쓴이 : 수박삼대 원글보기
메모 :